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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장 고려-몽골 연합대군 일본원정
도대체 강남군 3500척은 어디로 갔는가…

온종일 바다 위를 수색하며 그들의 행방을 찾아다녔으나 보이는 것은 이미 유령선단으로 변하여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있는 전선의 잔해뿐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참극에는 모두가 망연자실하여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보면, 이 때 몽골군 총 14만 중 10만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결국 강남군은 전멸한 셈이었다. 홀돈의 동로군에 속해 있던 가우리인 4000명 중 2000명도 상륙 후 귀국선을 타지 못하고 왜적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후에 고려와의 관계를 생각한 일본 막부측이 모두 일본인으로 흡수•처리하였다. 한편, 귀국선을 타지 못한 6600명의 몽골군은 모두 왜적들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두 번에 걸친 몽골의 일본 원정은 그때마다 현해탄을 급습하는 계절풍에 대한 무지의 결과로 참담한 피해만 입은 채 그 막을 내리고 만다.
이렇게 두 번에 걸친 몽골측의 일본원정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김방경의 가우리 군단은 그동안 한국의 남해안을 수시로 침범하며 분탕질을 일삼던 대마도와 일기도, 사카타 및 히라도섬의 왜적들을 소탕하여 소기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고 본진인 합포로 개선하였다.

이후, 몽골제국과 왕씨 가우리[王氏高麗]의 황실은 비록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실패에도 불구하고 동맹군을 형성했던 인연으로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었으니, 몽골제국은 황제의 공주를 가우리 임금에게 시집보내어 정비(正妃)가 되게 했으며, 가우리 역시 공주를 몽골의 황실로 시집보내는 등 두 황가의 결속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바로 이 점이 모든 국가를 노예로 지배했던 몽골로 하여금 가우리에 대해서만은 대등한 외교로 임하도록 한 가우리의 저력이었다.
이제 한집안으로 얽힌 몽골 황실은 가우리의 임금에게 그동안 무력만으로는 지배가 불가능했던 심양부(瀋陽府)를 통치해 주도록 의뢰해 왔고, 왕씨 가우리[高麗]의 충선왕(忠宣王)6)은 옛 고가우리[高句麗]의 영지였던 심양부를 접수하는데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충선왕은 한동안 가우리왕과 심양왕7)을 겸임하다가 한반도내의 가우리 왕위를 태자 충숙왕에게 물려주었고, 또 심양왕 자리는 조카인 고(暠)에게 양위한 후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 앉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심양의 고왕과 가우리의 충숙왕 사이에 가우리 왕위 계승권을 놓고 맹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심양부를 접수한 왕씨 가우리의 힘이 너무 강대해질 것을 우려한 몽골정부는 다시 심양부의 땅을 재정복하여 탈취해 가고 말았다.

1352년, 가우리의 새 임금으로 즉위한 공민왕은 그동안 정부의 공식 정책이던 대 몽골 우호정책을 버리고 가우리의 완전 독립을 위한 반몽골(反元)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더니 급기야 공민왕 5년에는 몽골의 대표부가 주재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되찾는다.

공민왕(恭愍王) 8년(1359년), 그 동안 중국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한 홍건적(紅巾賊)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서경(西京)까지 쳐들어왔으나, 이방실(李芳實) 등에 의해 격퇴되었다.

1361년 10월에는 무려 10만이 넘는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여 일시 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 정월, 최영(崔塋)과 이성계(李成桂)**) 등을 장군으로 삼아 관군 20만을 동원하여 개경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고무된 공민왕은 이성계를 대장군으로 하여 관군을 출정시켜 아예 몽골군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옛 가우리 땅을 모두 다물하고자 하였다.

이때 동녕부의 몽골 평장 기새인첩본아가 가우리에 침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가우리는 먼저 동녕부 정벌작전을 세운다.

공민왕 19년 1월, 가우리는 이성계를 동북면 원수의 자격으로, 서북면 원수 지용수를 부장으로 하는 제1차 원정군을 파병하니, 사령관 이성계는 동북면 기병 5천, 보병 1만명을 거느리고 황초령·설한령을 넘어 압록강을 넘어 동녕부를 기습 공격하여 동지 이오로첩목아를 항복받고 우라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또, 그 해 11월에는 다시 제2차 원정군을 옛 가우리의 옛 도성 요양성으로 진격시켜 이를 함락시키며 적장 처명의 항복을 받고 부장 김백연을 생포하니 기새인첩목아가 성을 버리고 달아남으로서 원정을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그런데 만주의 광활한 옛 고가우리[高句麗]의 영역을 완전히 다물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불행하게도 느닷없이 한반도의 남해안으로 침공해온 정규군 규모의 왜구(倭寇) 토벌이 더 급한 우선순위로 결정되면서 어려움에 처해졌고, 끝내는 대륙내의 몽골군을 물리치고 그 뒤를 쫓아 추격해 온 주원장(朱元璋)의 명국군(明國軍)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6) 가우리 왕위를 즉위 7개월 만에 태상왕(太上王)으로 물러나 있던 부왕(父王) 충렬왕에게 다시 빼앗기고 몽골에 머물던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원나라 황제에 오르게 하는데 공을 세운다. 그러자 몽골정부는 보은의 뜻으로 충선왕에게 심양왕을 맡아 당시 가우리의 전쟁포로, 항속민(降屬民), 유민(流民) 등의 집단을 통치하던 안무가우리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官) 영녕공(永寧公)의 임무를 대신하여 총괄하도록 한다.
충선왕은 1275년생으로 아버지는 충렬왕이고 어머니는 쿠빌라이칸의 딸 쿠틀룩 켈미쉬 공주로서 몽골이름은 이지르부카(益知禮普化)이다. 그는 1296년, 쿠빌라이칸의 장남 감말라의 딸 보타시린 공주와 결혼하여 징기스칸의 직계혈손인 황금씨족의 일원이 되었다.

7) 1310년, 심양왕은 심왕(瀋王)으로 개칭되고, 충선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을 계승하였고 다시 연안군의 손자인 탈탈불화(脫脫不花)가 계승하였다.

**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몽골에 아첨하며 여진의 남경(간도 지역) 지방관이 된 뒤부터 그의 아들 행리, 손자 춘 등이 대대로 몽골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몽골(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벼슬로 있었다.
그런데 몽골세력이 중원에서 밀리자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재빨리 가우리측에 붙어 가우리가 99년 만에 옛 땅을 쌍성총관부를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자춘은 이때의 공적으로 대중대부사복경이 되었고 1356년엔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벼슬을 얻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태조 4년)에 그의 선조 이안사는 목왕, 행리는 익왕, 춘은 도왕, 이자춘은 환왕에 추존하였다. 이들은 태종 시대에 이르러 선조들을 목조, 익조, 도조, 이자춘은 환조로 추존하였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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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수 118.39.162.132 2008-06-05

    안녕하세요 명인히 많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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