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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7장 왜적래습(倭賊來襲)
왜적래습 1

1591년 3월 9일,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에게 복종을 맹세한 휘하의 중신인 5명의 다이로(大老)와 3명의 주로(中老) 등을 오사카(大阪) 성으로 소집하여 전쟁에 돌입 할 것인지에 관한 의견을 형식적으로 묻고 자신의 결심을 통고하는 선에서 조선침략을 결정하였다. 이는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떠난 후 약 4개월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오사카회의 결과에 따라 전국의 영주들에게 즉각 선박 건조 할당량이 주어졌다. 히데요시는 대 조선 전쟁의 지휘 본부를 나고야(名護屋)성에 설치하고 1592년 3월 15일을 기하여 원정군역(遠征軍役), 즉 병력 동원령을 포고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영주들은 제 영토내의 쌀 생산량에 비례하여 보급품과 병사의 징집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정규군 30만 7천명에 더하여 10만 이상의 잡역부(수군의 노꾼 포함) 등 도합 40만 이상의 대병력이 동원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 일본은 분로쿠-文祿 원년) 3월 16일, 그 동안 일본 전국을 전쟁 준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히데요시는 교토를 출발하여 조선침략 전선의 총본부로 사용키로 한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향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나고야에 머무를 예비군과 조선으로 출병할 군단들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여 역사상 일본 최대의 군 행렬이 4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나고야성은 히데요시의 심복인 가토 기요마사에 의하여 단 두 달 만에 완성되었다는 전설적인 성으로, 조선 7년 전쟁 동안 일본의 작전지휘 본부로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대 조선 전쟁을 위한 총집결이 완료되자 출정군은 모두 9개 군으로 나뉘었다.

일본의 주력선인 아타카(安宅)선이다. 층루 위에 천수각 같은 건물을 세웠다. 왜국의 병선 건조사를 보면 이전까지의 배는 선체가 낮고 크기도 매우 작았는데 1500년 무렵부터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선체가 커지고, 크기도 커진 층루선 전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의 전선은 주력 전투함으로 아다께(安宅)-대형, 세끼(關)-중형, 전선들이 있고 그 외에 세이로오(井樓), 하야(早), 고바야(小早) 등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전함, 순시함, 공격함, 정찰선 등에 해당한다. 아다께는 50~150개의 노가 있고 세끼는 30~100개의 노가 있다.위 그림은 세끼 전투선이다.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 18,800명
제2군 : 가토 기요마사 20,000명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 12,000명
제4군 : 시마즈 요시히로 15,000명
제5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 24,000명
제6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000명
제7군 : 모리 테루모도 30,000명
제8군 : 우키다 히데이에 10,000명
제9군 : 하시바 히데카스 11,500명
총 동원 병력 15만 8천 8백 명

총 대 장 :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총 감 독 : 마스다 나가모리 (增田長城)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오타니 요시쓰구 (大谷吉繼)
육군감독 : 구로다 요시타카 (黑田孝高)
아사노 나가마사 (淺野長政)
육군대장 :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해군감독 : 후쿠하라 나가요시(福原長堯)
가케히 가스나오 (쩿一直)
구마타니 나오모리 (熊谷直盛)
모리 다카마사 (毛利高政)
해군대장 : 구키 요시타카 (九鬼嘉隆)
시마즈 다카히사 (島津貴久)
가토 요시아키 (加藤嘉明)
도도 다카토라 (勝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도쿠이 미치토시 (得居通年)
구루시마 미치후사 (來島痛總)
조선(朝鮮)
관리역 :
후루타 시게카쓰(古田重勝)

4월 2일(일본력 3일) 오전 8시, 육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1만 8천명이 선봉군으로 먼저 출항했고, 계속하여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도 선봉군을 따라 나고야를 떠났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개전 당시의 나이는 40세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가톨릭의 영세명은 Augustine(오거스틴)으로 그의 딸 마리아(영세명)와 결혼한 대마도의 작은 도주(島主) 요시토모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이들은 그들에게 영세를 준 포르투갈의 흉내를 내어 군기에 십자가를 군기(軍旗)에 그려 넣고, 포르투갈 출신의 천주교 신부를 종군시키며, 조선 침략군의 선봉으로 참전하여 그가 믿는 천주교의 정신과는 달리 조선백성들을 상대로 갖은 만행을 악랄하게 저질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당시 나이는 38세인데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양 종교인 천주교의 신자인데 반하여, 제2군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南舞妙法蓮華經(남무묘법연화경)’의 깃발을 군기로 삼았다. 그의 불심은 자신의 전용 군선에 불당을 만들어 놓고 전쟁 중에도 불공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월 2일 저녁 무렵, 고니시의 제1군은 일기도(壹崎島)의 가쓰모토 항에 도착했다. 4월 7일 밤, 제1군은 그 동안 역풍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겨우 대마도의 완노우라항(鰐浦港)에 입항하였으나 역풍이 점점 더 세차게 불어 할 수 없이 수일 간 이 곳에서 대기한다.

4월 10일 밤, 갑자기 바다가 잠잠해지더니 바람의 방향이 순풍으로 바뀌었다. 항해가 예정보다 늦어 초조했던 선봉장 유키나가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날 밤으로 출항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부터 조선의 부산포까지의 거리는 불과 50km에 불과하다.

4월 12일 이른 새벽, 고니시의 제1군과 그 꼬리를 물고 온 가토의 제2군은 목적지인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부산포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정발(鄭撥)1)은 오랜 습관대로 수하의 병졸 몇 명만 데리고 자신의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정발(鄭撥), 한때 흑의장군(黑衣將軍)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어느덧 60세의 늙은 몸이 되어 있었다. 정발과 그의 일행이 순찰을 위해 부산진성(釜山鎭城)을 나와 절영도(絶影島•영도)에 도착했을 때 아직 채 밝지 않은 새벽 바다 위로 수백 척의 왜선들이 바람을 등에 업고 무서운 속도로 전진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왜적들의 침입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직감한 정발은 즉시 부산진성으로 돌아가 휘하 병사 700여 명 전원을 비상소집하여 왜적의 침입상황을 알리고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게 하는 한편, 동래성으로 전쟁 발발의 긴급 상황을 알리는 파발마를 띄웠다.

마침내 한국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그리고 일본에서는 분록구(文祿)-게이쪼오(慶長の戰役)의 전 역으로 알려진 조•일(朝日) 7년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 정발(鄭撥)
본관 경주(慶州)이고. 자는 자고(子固). 호를 백운(白雲)이라 했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처 훈련원부정에 특진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서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東萊)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배향되었다.

동래부 순절도 (육군박물관 소장)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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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명환 218.154.62.156 2007-08-20

    제 생각에는 천주교도 종교명목으로 전쟁 엄청나게 했죠...인디언 대학살도 천주교가 명목이었구
    십자군 전쟁도 엄연히 많은 목숨을 앗아갔죠..마녀사냥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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