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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장 고려-몽골 연합대군 일본원정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제2차 일본원정(日本遠征) 2

한편 가우리의 연합함대에 감히 도전장을 내밀은 일본의 해적집단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들이야말로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가까이는 가우리의 해안이나 황해건너 중국해안으로 그리고 멀리는 남중국해(南中國海•南支那海)까지 진출하여 온갖 노략질과 살생을 일삼으며 바다에서의 죽음을 바다 사나이다운 영광으로 아는 악질 해적들이었다.

지난번에는 무방비 상태로 가우리 군단에게 기습을 당하여 얼떨결에 당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그 동안 7년간의 세월을 투입하여 해안가에 방어용 성도 쌓고 또 전투 병사들도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던 터였다.

그들의 전술이란 가우리 전선에 달라붙어 기어 오른 후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한편 왜적 선들이 맹렬하게 돌격해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던 가우리의 군선들은 돌연 주춤하며 돛을 모두 내리고 전선에 장착된 투석기에 기름을 부은 짚더미 공을 얹어 불을 붙인 후 화공으로 적선을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사실 그 동안 가우리군의 사령관인 김방경은 몽골의 총포 및 화약 제조기술을 알아내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몽골병들도 사용 방법만 알고 있었지 제조기술은 극비에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고려 군선들은 일제히 투석기를 발사하기 시작했고, 이 화공법은 예상 외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화공(火攻)을 당한 해적선들은 크게 당황하며 기동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러나 해적선들은 목선이었기 때문에 여간해서 쉽게 침몰되지는 않았다. 이에 태풍에 대비하여 튼튼하게 건조된 가우리 군선들이 느닷없이 불타는 왜적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자, 그 때까지 발버둥치던 해적선들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나며 침몰해 갔다.

김방경의 가우리 해군은 결국 대부분의 해적선들을 모두 격멸시켰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해적들도 하나하나 도살하며 해적 소탕전의 목적을 이루었다. 자신하던 바다에서의 전투에서조차 무기력하게 무너진 해적 두목들은 급히 배를 돌려 해안으로 도망쳐 숨어 버렸다.

하카타만의 해전으로 고려 해군은 또다시 많은 경험을 쌓게 되었고, 후일 세계 최강의 함대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하카타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한 김방경 장군은 가우리 전선에 승선한 몽골군을 모두 시가노섬에 상륙시켜 이 곳을 몽골측에 넘기고 예하의 가우리 병력을 이끌고 애초에 목적했던 제4의 해적섬인 히라도(平戶)섬으로 향하였다.

가우리의 해안에 출몰하는 해적들의 소굴은 크게 4곳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소굴은 지역적으로 가우리와 가장 가까운 대마도(對馬島)였고, 그 다음은 일기도(壹岐島)로서 해적들 중 가장 악독한 무리들이었으며, 세 번째가 하카타만 일대의 무리들 그리고 네 번째가 히라도섬의 패거리들이었다.

이때 몽골의 동로군은 먼저 상륙을 마치고, 양쯔강 남쪽 경원부(慶元府)를 출발한 강남군의 10만 대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우리군은 그 틈을 이용하여 히라도의 해적들을 마저 소탕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6월 14일, 가우리군은 먼저 나가토(長門)를 공격했고, 27일에는 목적지인 히라도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히라도의 해적들은 이미 대마도와 일기도 및 하카타만의 비극을 전해 듣고 미리부터 산 위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고려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 27일, 가우리군은 히라도에 도착하자마자 즉각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김방경은 해적들이 이미 산 속으로 소굴을 옮겼음을 알고 선발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은신처를 포촉한 뒤 겹겹이 포위하였다.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발하던 히라도의 해적들은 가우리군의 맹렬한 공격이 이틀간 계속되자 가우리군이 그들을 모조리 섬멸하기 전에는 결코 섬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은 스스로 가우리군에 항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이리하여 히라도의 두목들은 스스로 무리를 지어 김방경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의 잘못에 용서를 구하고 두 번 다시 가우리의 해안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은 김방경은 그들을 사면하기로 한다.

다행히도 이 곳의 해적들은 비교적 온순하여, 일기도의 해적 소탕전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작전을 끝낼 수가 있었다. 이로서 가우리의 김방경 도독은 또다시 가우리의 최우선 목표인 해적 토벌작전을 말끔히 성공시키고 다음 목표인 시가노섬의 해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기동하였다.5)

6월 30일 초저녁, 기다리던 강남군이 양쯔강 남쪽 경원부(慶元府)를 출발하여 약속된 히라도에 도착하였다.

강남군은 실질적인 지휘관인 범문호가 이끄는 군선 3500척과 10여만 명의 대군이었다. 이로서 홀돈(?都)의 동로군과 김방경(金方慶)의 가우리[高麗]군, 그리고 범문호(范文虎)의 강남군 등 일본 정벌작전에 참여하기로 한 모든 부대들의 집결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일본원정 연합군의 주력이어야 할 강남군단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니, 원정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던 대장군 아라쿠칸이 갑자기 병을 얻어 아카타이로 교체되었는데 신임 사령관은 바다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도 없는 순수한 육장이었다.

따라서 강남군의 지휘는 전적으로 부장(副將) 인 범문호에 일임하고 있었는데 이자는 원래 남송(南宋)의 항장(降將) 출신으로 이제 새로운 주인인 몽골측 체제하에서 벼락출세를 노리고 큰 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된 자였다.
이때 실질적으로 강남군의 지휘를 맡고 있는 부장 범문호는 몽골군 사령부의 작전지침에 정확히 맞추기 위하여 나쁜 날씨와 거친 바람을 무릅쓰고 무리한 항해를 감행하였다.

좌측 그림은 일본측에서 제작된 ‘몽고습래회사’에 실려 있는 것으로 여-몽 연합군의 침공루트에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는 일본군의 모습이다.

그 결과 배를 타 본 경험이 없는 강남군의 주력인 타타르의 10만 병사들은 배멀미에 몹시 시달려 초죽음 상태에 이르렀고, 소위 사령관역을 대행하고 있는 범문호 자신마저도 병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처럼 참담한 상태에서도 예정된 시간에 연합군의 집결장소인 히라도섬에 도착한 강남군은 적어도 병사들의 누적된 피로를 풀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휴식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이 무모한 부장 범문호는 도착 즉시 열린 지휘관 회의에서 정동사령부(征東司令部)로부터 받은 애초의 작전지시를 어길 수 없다며 식수 등의 보급품이 선적되는데 필요한 단 하루만 히라도섬에서 머물고 다음날에는 반드시 일본 본토로 가는 길목인 시가노섬으로 출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남송의 항장 출신 범문호가 이곳에 먼저 도착하여 전력을 추스르고 대기하고 있던 홀돈이나 김방경 부대에 앞서 먼저 전공을 세워 본국에 보고할 욕심으로 무리한 작전을 세우는 것이 너무나 자명하였다.

7월 1일, 바람이 불고 파도가 몹시 거칠어지자, 불길한 예감이 든 김방경은 강남군의 출항을 간곡히 말렸다. 그러나 범문호는 고집대로 끝내 3500여 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시가노섬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강남군이 먼저 출항하자 김방경의 가우리군과 홀돈의 동로군도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히라도(平戶)섬을 출발한지 1시간도 채 안되어서 수상쩍은 바람과 파도의 움직임에 불길한 징조를 감지한 김방경은 전 가우리 함대에 긴급히 회항을 명하는 백색 깃발을 올렸고 이를 본 동로군의 홀돈도 김방경의 뒤를 따라 그의 함대를 히라도로 되돌렸다. 결국이 지방의 날씨와 물길에 어두운 범문호의 강남군만이 가우리군과 동로군에 앞서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으로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게 되었다.

마침내 하카타만의 악몽이 되풀이 되었다. 1281년 7월 1일 밤, 느닷없이 불어 닥친 태풍이 3500여 척의 군선과 10만 명의 강남군을 거의 집어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일본을 구한 이 바람 역시 일본인들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신불의 가호라고 생각하고 신풍(神風-가미카제)이라고 불렀다.

7월 2일, 아침이 밝아오면서 강남군의 거대한 함대를 10만 명의 병사들과 함께 물속에 수장시킨 광란의 태풍은 조용히 물러갔다.

당시의 강남군 군선들은 쿠빌라이 대칸의 성화에 쫓겨 급조된 양쯔강의 운반선 규모였기 때문에 큰 바다에서의 항해를 강행하던 중 무방비 상태에서 만난 험한 태풍우(颱風雨)의 엄청난 파괴력을 견뎌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가우리 군선들은 7년 전 제1차 원정 때 경험했던 태풍에 위력에 대비하여, 대대적으로 개량하고 더욱 튼튼하게 선체를 보강하여 건조된 최신예 전함들이었기에 태풍의 위력을 견뎌내었다.

게다가 불순한 기상의 변화를 미리 감지한 김방경이 히라도섬으로 회항시켜 군선들을 서로 묶어 정박시킴으로써 태풍에 대비했기 때문에 가우리군단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지혜로 군선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김방경과 홀돈은 어젯밤 옹고집으로 항해를 강행한 강남군의 안전이 걱정되어 아침 일직부터 수색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5) 시가노섬으로 향한 가우리군이 시가노섬에 도착하여 토벌전을 행하였는지 또는 이동하는 도중에 강남군의 도착 소식을 듣고 되돌아 왔는지에 대한 것은 확인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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