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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8장 이순신함대
이순신 함대 제1차 출동(李舜臣 艦隊 弟一次 出動) 1

“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明國 提督 陳璘)
“하늘로 날을 삼고 땅으로 씨를 삼아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릴 인재로서,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키는 공을 세웠다.”
(명나라 제독 진린)

진린은 명나라 제독으로서 소위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조일 7년 전쟁에 참전하였다. 갖은 못된 짓으로 조선의 성웅 이순신을 괴롭히고 적장의 탈출구를 마련해 주는 0등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순신을 극도로 질투하고 공까지 가로챈 그였지만, 이순신이 혼자의 힘으로 해를 목욕시키는 일과 같은 절대 불가능한 일을 해내자, 이에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이순신의 인물과 공적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다.

1592년 4월 11일, 그 동안 조방장(助防將) 정걸(丁傑)과 나대용(羅大用)을 중심으로 개량해 온 판옥선에 철판을 붙인 뚜껑과 대포 사격이 가능한 용머리 및 돛을 달고 각종 대포들을 장착하여 중무장시키니 세계 해군 전사(戰史)상 불가사의한 신비의 돌격선 귀선(龜船 거북선)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1592년 4월 12일 아침, 이순신 함대의 최선봉 돌격선으로서의 새로운 임무를 담당하게 될 귀선(龜船, 거북선)의 진수식(進水式)이 거행되었다.
배의 이름은 귀선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이는 완성된 돌격선의 모습이 흡사 거북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거북선의 크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체의 길이는 27.6m, 머리에서부터 꼬리 끝까지는 무려 33.7m 그리고 너비가 9.2~10.4m에 높이가 6.6m에 달하는 거선(巨船)이었다.

거북선의 승선 인원을 보면 우선 선격, 무사, 타공, 요수, 정수 등이 각각 2명씩, 사부, 화포장, 포수 등 전문 포병이 52명, 노 젓는 이가 100명인데 그 중 80명은 거북선 좌, 우현의 노 8자루씩 모두 16자루의 전속이었고, 20명은 예비병이었다.

노는 배의 기동력을 좌우하는 것으로, 한 자루당 노장 1명과 4명의 병졸이 달라붙어 전투 중에는 전원이 서로 교대하며 전력을 다하여 노를 젓게 된다. 주요 화력으로는 좌우 방패 판에 각각 22개씩 총구멍이 있고, 거북 머리에도 2개의 소포 구멍이 있으며, 아래 양쪽에는 대포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다. 배 양편에 12개의 대포 구멍이 있고 꼬리 쪽에도 포 구멍이 있다.

거북선의 주포로는 천자(天字), 지자(地字), 황자총통(黃字銃筒) 등이 있었다. 그 중 황자총통은 군함 머리 속에 숨어 있다가 전투 중 적의 대장선 밑으로 파고들어, 포를 자유자재로 회전시키며 발사하여 적장을 죽이는 등의 특수 목적에 사용되었다.

한편, 천자총통은 포의 중량이 1290근이었고, 한 번에 사용되는 화약 무게만 해도 무려 30근이나 되었다.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을 발사할 경우 그 도달 거리가 10리(4Km)에 달했고, 조란환(鳥卵丸)을 무려 300개나 한꺼번에 발사할 수 있는 대량 살상용 무기였다.

이처럼 중무장한 거북선의 탄생으로 이순신 함대는 세계 최강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유하게 된다. 거북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정조 19년(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좌우 뱃전에 신방(信防)이라는 난간(欄)을 설치했고, 난의 머리에 가룡(駕龍)이라는 횡량(橫梁)을 걸쳐 뱃머리까지 닿게 하였다. 그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방패 판을 둘러 꽂았다. 방패판위에는 언방(偃防)이라는 난간을 세웠는데 현란(舷欄)에서 패란(牌欄)까지 높이는 4자 3치, 패란 좌우에 각각 귀배판(龜背板) 11개를 비늘처럼 마주 덮고 그 등에 1자 5치 되는 틈을 두어 돛대를 뉘었다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4자 3치, 넓이는 3자로서 입을 통하여 유황 염초의 연기를 토하는 연막전술이 가능하게 하였다. 좌우 포판(?版) 아래 방은 각각 12간인데 철물보관소로 2간을 쓰고 나머지는 화포, 창검, 활과 화살 등의 무기고로 썼다.
아래층에는 19간의 병사들 숙소가 있다. 왼쪽 포판위에 선장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장교실이 있으며, 병사들은 평소 아래 칸에서 쉬다가 전투시에는 포판위로 올라와 대포를 발사했다.”
고 기록하여 놓았다.

이때 이순신은 모두 3척의 거북선을 건조하였는데, 전라좌수영인 진남관 앞 지금의 중앙동에서 이순신 자신이 직접 감독하며 만든 영귀선(營龜船)과 돌산섬 군내리에서 만든 방답귀선(防踏龜船) 그리고 여천군 쌍봉면 조선소에서 만든 순천귀선(順天龜船)이 그것이다.

거북선의 내부구조에 관해서는 각 학자마다 모두 제각금의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왔다. 위에 보이는 그림은 그동안 세계 최초의 관광 잠수정을 만들어 사이판과 제주도에 띄워본 경험이 있는 본 저자가 모든 자료를 분석하여 실제 전투선에 적합하도록 재현해 본 것이다.

중국인이 본 귀선
중국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북선의 모형.

전라죄수영 귀선
권수도설(卷首圖說)에 수록된 귀선도(龜船圖)

통제영 귀선

1592년 4월 12일, 그동안 신비의 베일 속에 쌓였던 첫 번째의 귀선(거북선)인 영귀선(營龜船)이 건조되어 영광스러운 진수식을 갖게 되었다. 아침부터 흥분한 이순신은 처음 진수한 거북선에 승선하여 여러 가지 함재 대포들을 쏘아 보며 실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하자의 유무를 철저히 점검하였다. 지금까지의 관찰한 최초의 거북선은 기대이상의 기동력과 가공할 파괴력을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미심적은 이순신은 귀선의 현역 투입에 앞서 마지막 과정으로 가상해전 연습을 실시하였는데, 수병들이 새 전함의 속성을 숙지하고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한동안 맹렬한 반복훈련을 거듭하게 하였다.

이처럼 이순신이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국론으로 정해 놓은 왕명을 어겨가며 새로운 전함을 건조하는 등 고전분투하고 있는 동안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증명시키기라도 하듯이 같은 날 새벽을 기하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왜적들이 하여 부산진(釜山鎭)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일 후, 원균(元均)은 왜란(倭亂)과 부산진의 함락을 통보해 왔고, 4월 19일에는 관찰사 김수로부터도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규정상 상부의 허락없이 그의 관할 지구인 전라좌수영을 벗어나 경상우수영의 작전지역으로 출동할 수가 없었다.1)

만약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 이연의 허락없이 임의대로 군을 이동시켰다가는 후에 역모를 꾀했다는 등의 어떤 문책을 당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4월 17일 아침, 긴급히 출발한 김수 관찰사의 파발마가 한성에 도착하였고, 성격이 변태적인 왕 이연이 불참한 가운데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왕을 달래어 겨우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 원균의 경상우수군 작전구역 내로 이동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는데. 결국 김수가 요청한 날로부터 무려 10일이 지난 4월 27일 오후 7시에 비로서 조정의 파발마가 전라좌수영에 도착하였다.
이제야 국왕은 이순신에게 채워둔 족쇄를 풀어준 것이다.

이순신은 즉각 경상우수군의 현재 상황과 서로 만날 장소를 문의하는 한편 전라좌수영 내의 모든 지휘관도 4월 29일까지 출전 준비를 끝내고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4월 29일 정오, 원균의 파발이 도착하였다. 그런데 원균으로부터 온 소식은 사태가 이순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여 처음 계획했던 단독 출전으로는 왜적들을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원균의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왜적의 규모는 5백척 정도로 적선은 현재 부산, 김해, 양산강(梁山江), 명지도(明旨島)에 정박 중이라는 것이었다.원균은 또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결국 이를 막지 못하고 경상우수영2)이 적에게 함락되었으니 이순신과 만날 장소를 당포(唐浦:통영군 신양면 산덕리)로 정한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원균 함대와 연합하여 작전을 펼 생각이었으나, 원균의 공문을 보니 적선은 500척이고 경상우수영은 이미 괴멸된 상태였다.

그러면 이순신은 그의 전함 24척만으로 적의 500척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미 경상 좌, 우수군이 모두 괴멸된 상태에서 전라좌수군마저 괴멸된다면 나라의 운명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마침 이순신의 요청을 받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은 전라우수영에 명령을 내려 이순신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광의 명을 받은 이억기는 4월 30일, 전라우수영 함대를 이끌고 즉각 출동하겠다는 공문을 이순신에게 보내왔다.

이에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마치고 이억기의 함대가 도착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3일이 되어도 오지 않자, 이순신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병사들을 일찍 쉬게 한 후 5월 4일 드디어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만으로 여수를 출항했다.

이순신 함대의 처녀 출전에는 전라좌수영의 모든 함선이 총망라되었다. 우선 전투함인 판옥전선(板屋戰船)이 24척, 통신 연락선인 협선이 15척 그리고 전선의 수효가 많은 것처럼 적을 기만하기 위하여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군기를 휘날리며 뒤를 따르게 하니 동원된 선박의 수효가 총 85척으로 멀리서 보면 대규모 함대처럼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군함은 판옥 전선 23척과 거북선 1척 뿐이었다.

처녀 출전한 이순신은 매우 불안한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아직까지 왜적을 만나본 일이 한번도 없어서 적의 전투력에 대한 파악이 되지않은 상태에서 남해 현령 기효근이 겁을 먹고 사천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왜적의 배후 공격에 대비하면서 전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좌, 우 2개의 수색조를 편성하여 왜적의 행방을 탐색하면서 각지에 숨어 있는 군관들을 찾아 소비포로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통제영귀선

좌측의 그림은 이순신의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이다. 거북선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가장 신비스러운 미스터리를 연출한 전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Navy Memorial Museum), 중국의 역사박물관(歷史博物館), 프랑스의 해사박물관(Musee de la Marine), 일본, 영국 등이 앞 다투어 그들의 박물관에 그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1) 혹자는 원균의 요청에 이순신이 즉각적인 출동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는 어떠한 경우라도 중앙 조정의 승인없이 남의 작전지역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균이 이순신의 도움을 얻고자 하면 먼저 경상감사에게 요청해야 하고 그다음 감사는 조정에게 그리고 다시 조정의 명령이 전라감영을 통하여 전라 좌수사에게 출동을 승인하게 된다.
왜적의 기습으로 조일전쟁이 발발하였다는 긴급소식이 이순신에게 도달되는 과정은 본서 P147페이지의 지도에 자세히 밝혀 놓았으니 다시 한번 참고하기 바란다.

2) 경상우수군이 적선 10척을 격침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이 부분은 원균의 거짓말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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