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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8장 이순신함대
이순신 연합함대(聯合艦隊) 제2차 출전 전과 3

이 그림은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 당시 야스하루의 어란진을 역 포위하여 잡는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도(鶴翼陣圖)이다.

이 해전에 관한 ‘협판기(脇坂記)’라는 일본측의 기록을 참고해 보기로 하자.

“처음에 우리(일본측)는 조선의 전선들을 약 30리 정도 추격하여 나갔다. 조선 배들은 좁은 수로를 재빠르게 빠져나가 넓은 바다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더 많은 조선의 군선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우군(倭船)의 배를 포위하고 들락날락거리면서 공격하였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할 수 없이 좁은 수로로 다시 후퇴하려고 하였으나, 적선(이순신 함대)들이 퇴로를 막고 커다란 불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결국 아군의 배들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야스하루(安治)의 가신(家臣) 아타나베(渡邊七石衛)와 와키자카(脇坂左兵衛)를 비롯하여 높은 사람들이 많이 전사하였다. 대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노가 많은 배를 탄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도망치는 도중에 조선군의 공격으로 갑옷에 화살을 맞아 위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이상은 난중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 해전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일본장교의 생생한 증언이니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돌격선인 두 척의 거북선을 좌우로 세우고 학익진으로 적을 포위한 뒤, 유명한 정(丁)자 타법으로 적을 섬멸해 가는 이순신의 천재적인 작전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 해전이었다.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이 한산도 해전을 통하여 일본의 야스하루 함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특공선단 6척으로 야스하루 일본 함대를 유인하는 이순신 제독.

어란진으로 공격해오는 일본함대를 학익진으로 잡는 이순신 연합함대.

세계의 해전사를 보면, 18세기 까지도 해전 초반에 대포를 쏘고, 그 다음에는 백병전으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따라서 16세기에 벌써 학익진을 이용하여 순수 함포전으로 적 함대를 괴멸시킨 이순신 제독의 현대적 해전은 가히 세계 최초의 현대적 해전으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전의 전적을 보면 적의 주력 전함 35척을 포함하여 총 59척을 격침시켰으며 겨우 살아 도망간 배는 야스하루의 배 1척과 소형 쾌속선 13척 뿐이었다.
또 이 해전에 참전한 1만여 명의 왜병들 중 8980명이 도살되었고, 400명이 한산도로 도망쳤으나, 그 중 210명은 잡혀 죽고 190명만이 뗏목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7월 9일, 제독은 역풍이 불어 항해가 힘든데다가 한산도해전을 치르느라고 병사들이 극도의 피곤을 호소함으로 외즐포에서 하루를 쉬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장교들은 따로 불러 적의 본영을 공격하기 위한 작전을 지시했다.

그 다음날인 7월 10일 새벽, 이순신 제독은 일본해군의 본영인 안골포(安骨浦)를 소탕하기 위하여 다시 외즐포를 출발하여, 21km를 항해한 후 오전 7시경에는 벌써 안골포의 입구를 철저히 봉쇄해 버렸다.
이때 왜군들은 이미 한산도 해전에서 괴멸당한 야스하루 함대의 소문을 듣고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바로 그 공포의 이순신 함대가 안골포만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안골포(安骨浦)에는 일본해군 총사령관인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연합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또한 일본 최대의 거함인 니혼마루(日本丸)11)를 비롯하여 오타루마루(小樽丸), 나미키리마루(波切丸), 야마시라즈마루(山不知丸) 등 기라성 같은 전함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안골포는 지형이 얕고 좁으며, 썰물 때에는 마음대로 항내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들을 큰 바다로 유인해 보았으나 이미 야스하루 함대의 전멸 과정을 보고받은 일본 해군사령관 구키 요시타카는 오히려 더욱 항내 깊숙이 숨어들어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 제독은 할 수 없이 밀물 때를 기다려 전함들을 줄이어 투입하게 하였다.

이 작전은 적 함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전함이 천, 지, 현자 총통 및 각종 대포를 발사하고, 장전된 포탄이 다 떨어지면 재장전으로 지체하지 말고 즉시 빠져나와 다음 배가 연이어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투는 자연히 길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온종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저녁 8시경이 되자, 안골포만은 온종일 진행된 함포전의 결과로 지척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포연(砲煙)과 파괴된 적선들의 화염으로 뒤덮히게 되었는데, 결국 안골포내의 모든 왜 함선들은 적의 기함 니혼마루(日本丸) 포함하여 대부분 불에 타거나 격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안골포에 어둠이 깃들어 피아를 구별하기 힘들게 될 무렵 이순신은 적의 기함 니혼마루(日本丸)도 항해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다고 판단하여 일단 전투를 끝냈다. 그리고 항구의 입구를 봉쇄한 채 밤을 지새운 뒤, 다음날 아침 다시 잔적을 마저 소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 온종일 계속된 전투로 피곤에 지친 몸을 견디지 못하고 파수병들이 깜빡 잠든 틈을 타고, 항해 불능으로 보였던 니혼마루가 구키 요시타카12)와 가토 요시아키를 태우고 몰래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11일 새벽이 되자,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다시 왜적 소탕전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잔적들은 모두 도망쳐 버린 뒤였다.

이순신 제독은 즉시 수색조를 편성하여 양산강, 김해강 일대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으나, 이미 왜적들은 모두 허둥지둥 부산 쪽으로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이로써 운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남해의 해운항로(海運航路)를 확보하려던 왜군의 비상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남해의 해운선 확보에 실패한 일본군은 이미 북쪽으로 진출했던 왜병들 순서로 군수품 부족에 따르는 극심한 고통과 다가오는 겨울 추위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이순신 제독은 전 연합 함대를 모아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게 하여 함대의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게 한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무력시위를 육지에서 지켜본 왜병들은 이제 그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되었다. 매사에 주도면밀한 제독이 적의 기를 꺾는 심리전을 펼쳐 보인 것으로 이때의 효과는 이후에 전개되는 모든 해전에서 이순신 공포증을 유발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안골포해전의 전과를 살펴보면, 애초부터 안골포만에 정박했던 일본 해군선의 대형 전선 21척과 중형 전투함 15척 그리고 소형 쾌속선 6척 중 거의 모두를 파괴 내지 침몰시켰으나, 기함 니혼마루가 만신창이가 된 채 탈출하였으므로 옥에 티가 되는 전과를 낳았다.

그러나 구마노 해적(熊野海賊)으로 명성을 날렸던 적의 사령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육지로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기함에 남아 전투를 지휘하였고, 따라서 그의 부하 수병 5900명도 함께 각각의 소속된 전선에 남아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이 이 해전에서 몰살에 가까운 희생을 당했다.
한편 이순신 함대측에서도 19명의 전사자와 115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연합함대 소속 전선 중에는 손실을 입은 전선이 단 한 척도 없었다.

이로서 이순신 제독은 삼도 연합함대를 이끌어 25일 동안 또다시 일방적인 전과를 올리고 제3차 출동 해상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11) 니혼마루(日本丸)
히데요시가 조선에 올 때 타기위하여 특별히 건조한 배이다. 전장이 70m, 노의 수가 120자루에 선상에는 천수(天守) 같은 큰 누각까지 갖춘 일본 최대의 기함이다.

12) 구키 요시타카
(九鬼嘉隆,1542~1600)
구마노 해적(熊野海賊) 출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막하에서 시마(志摩) 지방의 영주로 수군(水軍)의 장(將)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밑에서도 역시 수군 조직의 중책을 맡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와 함께 일본해군 9000여 명을 이끌고 이순신 제독에게 대패하고, 쓰시마섬(對馬島)에서 군선(軍船)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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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욱 221.162.133.227 2007-10-03

    왜 답변을 해 주시지 않는지요 ??????

  • 박정욱 59.19.59.105 2007-09-24

    그림내용을 살펴보면 겨우 10리도 채되지않은 거리입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이 사이트를 통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 박정욱 221.162.133.131 2007-09-21

    학익진을 펴치는 위치가 정확한지요? 협판기에 쓰여 있듯이 30리정도를 추격하였다면 한산도의 혈도 부근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산양면 영운리와 한산면 혈도부근까지 추격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윗글은 견내량을 빠져 나오자 바로 붙는것으로 되어 있어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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