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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장 고려-몽골 연합대군 일본원정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 제1차 일본원정(日本遠征) 2

대마도와 일기도의 해적을 소탕한 가우리군단은 이로써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하였다. 이제 하카다(搏多)에 근거지를 둔 해적들만 남은 것이다. 하카타 해적들은 한반도를 조상의 나라로 여겨 주로 멀리 중국을 상대로 노략질을 해 왔으며, 또 가우리 해안에 출몰하는 경우에도 불필요한 살인은 삼가해 온, 비교적 온건한 해적들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은 이 곳으로 상륙하여 일본정부의 항복을 받아 내려하였으므로, 가우리도 동맹국인 몽골을 도와 이 작전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몽골군은 이곳의 바다를 스스로 항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0월 16일, 히라도(平戶) 섬을 정복하고 10월 17일에는 다카시마(鷹島)를 공격, 노고(能古) 섬을 점령하여 하카타 상륙 준비를 마쳤다.
이 시점, 현해탄의 거친 파도를 항해하는 병사들의 고통은 대단히 심했다. 특히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몽골 병사들은 심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여몽 연합군 병사들은 노고섬에 먼저 상륙한 뒤 하루 동안 부담없는 휴식을 취하였다.

10월 19일, 하카타의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이마쓰(今津)•하코자키(ㅀ崎) 등지로 분산하여 상륙전을 전개하였는데, 김방경 사령관은 중군(中軍)을 이끌고 소하라(?原) 지역으로 상륙하였다. 그러나 소하라에는 대마도와 일기도의 비참한 소탕전 소식을 들은 하카타 해적의 주력들이 미리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싸움은 시작되자마자 곧 승부가 가려졌다. 몽골 포병의 지원을 받아가며 가우리[高麗]군은 즉각 해안에 상륙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곧이어 소하라 일대 해적들의 본거지를 습격하여 반항하는 자들을 격살하고, 그들의 소굴은 불질러 버렸다. 비로소 기가 꺾인 해적들은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

옛 백제와 가야의 유민들이 한반도 패권전에서 패배하여 나라를 잃고, 망국의 슬픔을 곱씹으며 목숨을 걸고 거친 현해탄을 건너 도착한 밝은 땅, 하카타(搏多,밝다)였다.
그러나 이제는 옛 조국의 군함들이 몰려와 넓은 하카타만을 메우고, 이 곳을 소굴로 삼고 있는 해적들을 상대로 소탕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연합군은 19일 아침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승리하고 거뜬하게 전진 기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연합군은 계속해서 해안을 따라 왜성(倭城)들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여몽 연합군의 출정 목표가 애초부터 가우리의 남해안을 침입하던 해적들의 소탕이었던 가우리측은 해적의 본영이던 대마도와 일기도, 히라도, 노고섬 등을 철저하게 초토화시키면서 그 목적을 달성하였지만, 일본정부의 복속을 목표로 한 몽골측의 군사작전은 밝다(搏多-하카다)만의 상륙을 완수한 지금부터가 그 시작이었다.
이 말의 뜻은 해적소탕전이 가우리군의 작전을 몽골 측에서 돕는 형식이었다면 지금부터의 싸움은 몽골군이 주관하고 가우리가 그들을 돕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당시 1274년 10월 19일, 일본측에서 말하는 소위 ‘분에이 난(文永の役)’이 본격적으로 막을 열었으니 일본의 분에이(文永) 11년이었다.

이때, 교토(京都)의 일본측 조정(朝廷)에서는 1268년 1월에 도착한 쿠빌라이 대칸의 국서(國書)를 받고 몽골의 침입가능성을 일직부터 예지하고 있었다. 너무나 놀라고 당황한 가마쿠라 막부(괜倉幕府)는 신불(神佛)에 제사하며 전란을 막아달라는 기원을 하는 한편, 2월에는 규슈(九州) 다자이후(大宰府)에 몽골래습(蒙古來襲)을 경고하고 만전을 기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다자이후는 쇼니(少貳)를 겸한 진서봉행인(鎭西奉行人)인 무토우(武여)일족을 대장 격으로 하여 북규슈 일대의 병력을 총 동원하여 적의 상륙지점으로 예상되는 하카다(밝다만) 일대에 포진하여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몽골군의 침공을 맞설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경악하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막상 눈앞에 나타난 여몽 연합군이 강력한 단궁과 쇠뇌 등을 개인 기본 장비로 휴대하고 또 왜병들로서는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철포(鐵砲)로 중무장 한 엄청난 군세(軍勢)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왜군의 선봉장 다케사키는 상륙군이 채 진영을 갖추기도 전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악착같은 공격을 시도해 보았다.

이때 전개된 전투의 진행 상황이 히고(지금의 구마모토현)의 고케닌(御家人) 다케사키(竹崎季長)의 활약을 그린 종군화가의 작품 ‘몽골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 교전당사자들의 군복장이나 장비 등을 다시 재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의 양측 전투방식은 큰 차이가 있었는데 일본측이 개인 혹은 소수단위로 접근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과는 달리 가우리나 몽골측은 부대 단위로 전략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 전투방식을 기본 전투방식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어지러이 달려드는 일본병사들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은 마침내 주력철포를 일제히 발사시켜 단 일격에 적의 선봉을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게 하니 공포에 질린 일본군은 하카다와 하코자키(箱崎)의 중요한 해안선을 버리고 다자이(大宰)부 방면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20일이 되자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며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러운 일기 변화를 불안하게 느낀 김방경 장군은 즉각 연합군을 해안가로 후퇴시키고 군선들을 긴급히 대피시켰다.

밤이 깊어지자, 비바람이 더욱 험악해지더니 급기야 폭풍우가 불어 닥치기 시작하였다.

<연합함대의 신풍 참상도>

밤이 깊어지면서 폭풍우는 엄청난 태풍으로 변하였고, 배를 지키려는 병사들의 안간힘도 무색하게 가우리의 군선들을 마구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이 엄청난 태풍의 위력 앞에 하카타만은 아비규환으로 변했고 연합군의 군선들은 성난 파도에 휩쓸리며 서로 충돌하며 부서져 침몰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군의 복장
군복은 원시사회로 올라갈수록 남에게 돋보이려는 장식과 과장된 몸치장을 하게 된다. 왜장이 마치 장닭이라도 된 듯 화려한 군복으로 뽐내고 있지만 그의 손에 들려있는 엄청난 크기의 장궁은 사거리나 파괴력에서 가우리나 몽골측의 단궁이나 쇠뇌에 비해 불과 1/3에도 미치지 못했다.

당시 몽골군의 복장
백병전에 의존하는 일본측의 군 복장에 비하여 집단전투의 현대적인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의 복장은 훨씬 더 간편하고 현대적이다. 그들의 주무기인 단궁이나 쇠뇌의 위력이 일본측의 그것과 비교하여 3~4배나 강력했음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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