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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2장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1

지금까지 본서는 한국 해군사에 기록된 가우리[高麗]해군으로부터 이순신(朝鮮) 해군까지의 발전 과정과, 세계 해군사에 가장 위대한 제독으로 기록될 신장(神將) 이순신 제독의 탁월한 함대 운용(運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 일 7년 전쟁의 전세(戰勢)를 완전히 역전시켜 놓은 최대의 승부처 명량해전(鳴梁海戰)으로부터 제독이 종전(終戰)의 순간을 보면서 그의 목숨을 산화(散花)시킬 때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스케치 하고 마무리 짓기로 한다.
명량해전에서 대첩을 이룬 이순신 제독은 우선 인근에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잔적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진도 일대를 정밀히 수색하였으나 그곳에는 이미 겁을 먹은 왜군들이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이즈음 이순신과 그의 병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던 대해전의 후유증으로 극도의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순신 제독은 또 하나의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왜적의 육군 선발대들이 9월 6일에 법성포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법성포 라면 우수영 해군본부로부터 불과 3~4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이들은 일본의 해군작전과는 별도로 육군의 힘으로 이순신의 본영을 공격하라는 별도의 작전 명령을 수행중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전 함대를 다시 출동시켜 법성포로 향하였다. 이순신의 기동함대가 법성포에 도착한 것은 9월 19일 늦은 저녁이었으니 왜적이 법성포를 유린 한지 불과 3일만이었다.
그런데 이순신보다 한발 앞서 적성포의 왜장들은 명량해전으로 일본군 약 10만이 참패했다는 소름끼치는 소식을 전달받고 크게 당황하고 있던 중이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그처럼 무서운 이순신 함대가 법성포 앞바다에 나타났던 것이다.

위 지도는 이순신 기동함대의 항해경로를 보여 준다.

이순신은 기동함대를 일렬로 세우고 해안의 적진을 향하여 한차례의 일제 함포사격을 퍼부으며 강력한 함대 시위를 전개하여 그들의 기를 꺾어 놓은 후, 법성포 앞바다에서 결진하고 그들을 노려보며 밤을 새웠다. 날이 새면 일제히 상륙하여 왜군을 도륙 내겠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다1).
이처럼 초전의 기 싸움에서 밀린 왜병들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그 밤이 새기 전에 모조리 도망치고 말았다.

일단 서해안의 왜적들을 쫓아내는데 성공한 이순신은 해군기지를 보화도로 옮기고 그곳에 조선소를 세운 후, 모든 조선공들과 휘하의 군관민을 총동원 하여 함대 재건(再建) 작전에 돌입한다.
그런데 이순신은 조선 해군을 재건하는데 필요한 함선 이외에도 그 배에 장착할 무기도 손수 제작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동과 철, 유황, 화약 등등 노력만으로 조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이것들은 결국 사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왕은 그것을 위한 지원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생각해낸 것은 소금2)을 자체 생산하고 이를 팔아서 돈을 만든 후 그 돈으로 필요한 군수품을 사들이기로 한다.
결국 이순신은 쌀농사로 군량을 자체 조달하고, 소금생산으로 무기제작에 필수품을 마련하며, 또 한편으로는 적과 대적해야 했으니 이를 어찌 왕 이연의 군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난중일기초’의 기록에 의하면 10월 13일을 기하여 13개의 염전을 만들었고, 김종려(金宗麗)를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에 임명하여 소금 증산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순신과 그의 병사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원균이 말아먹은 조선의 함대를 재건하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불과 108일 만에 29척의 새로운 전선을 진수시키는 기적을 창조해 낸다.
이로서 이순신 함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선 13척을 합하여 모두 42척으로 증강되었고 수병들도 8000여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순신의 기동함대가 다시 불사조 같이 재건되어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는 왜적 함대와 정면 승부를 걸어볼만한 자신도 얻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 제독은 새롭게 편성된 그의 함대를 이끌고 왜적과의 대치 거리를 좁히며 고금도(古今島)로 옮겨 갔다. 이곳 고금도에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있는 왜교까지는 불과 140Km의 거리였다.

고니시는 벌써 순천의 왜교(倭橋)에 견고한 왜성(倭城)을 지어놓고 조선의 남부에 흩어져있던 병력을 총 집결하여 무려 15000여명의 정예 병력과 대형선박 수십 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불과 8천명의 병력으로 고금도에 해군본부를 설치하고 바다로 통하는 출구를 철저히 봉쇄하였다.

이순신이 이처럼 조선 해군의 재건 사업을 착착 진행시켜 그 결실을 맺고 자신감을 얻어갈 때, 사대주의(事大主義) 골수분자였던 조선의 국왕 이연은 명나라에 구걸하여 소위 천장(天將)이라는 명국의 수군장수 진린(陳璘)을 보내면서, 통제사 이순신은 그의 지휘를 받으라는 명(命)을 함께 보내왔다.

이때 진린이 끌고 온 명국수군3)의 규모를 보면 사선(沙船,멨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飛海船) 17척, 잔선(?船) 9척, 에 병력은 중국에서 가장 정예라는 광동(廣東) 수군 5000여명이었다.

이것들 중 주력 전투함은 사선인데 약 100여 명이 승선할 수 있고, 중선인 호선에는 약 30여 명이 탑승한다고 한다. 그 외에 비해선은 글자 그대로 쾌속 정탐선이고, 협선은 작은 연락선이나 보조선이니, 천자국의 대함대라고 요란하게 허풍을 떨었지만 그 규모면에서 보면 이순신 함대의 반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규모였다.

이따위의 전선으로 어찌 200여명이 승선하는 일본의 최신형 안택선과 상대할 것인가. 이것이 천자국인 대명국 수군의 실체였다면 허풍이 빠진 그들 수군의 전력은 조선이나 일본의 수군에 비해 마치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겨우 이런 정도의 지원을 받고자 그동안 그처럼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상국으로 모셔왔단 말인가?

어찌됐던 그들이 조선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들고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이순신 제독도 처음에는 명국수군의 그 뜻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정중히 대했다. 그런데 진린의 태도가 대단히 교만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어 조선인 대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함부로 대할 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마저 살인과 약탈, 유부녀 강간 등의 범죄를 마구 저지르는데도 조선의 관리들은 항변도 제대로 못하고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이 모두가 명국 왕을 하늘로 모시는 사대주의를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스스로 명국 왕의 신하를 자처하는 조선의 못난 왕이 그들의 뜻을 거스르지 말도록 이순신의 행동에 족쇄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명국수군의 개 같은 행동을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먼저 자신의 부하와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또 한번 국왕의 어명을 거역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순신은 진린을 찾아가 명국수군과의 동맹관계를 끊고, 조선군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것이며, 그동안 조선해군이 명국수군에 조달하였던 식량 제공도 이것으로 끊어 버릴 것이라는 통첩을 하였다.

이러한 이순신의 행동은, 적이 흘려준 정보를 믿고 적의 함정 속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왕명을 없수이 여긴 죄”라며 죽이려고까지 했던 왕 이연에게 또 하나의 트집거리를 줄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동안 왜적 못지않게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마치 굶주렸던 거지처럼 갖은 못된 짓을 마구 자행하는 명국군의 행패를 보면서도 조선의 관리들은 그저 못 본체 얼굴을 돌리곤 하였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또다시 목숨을 걸고 소위 천자의 신하 장수라는 진린에 맞서 그들의 잘못을 통렬히 꾸짖고 동맹파기라는 월권적 행동을 거침없이 선언 하였던 것이다.

1) 명량 대 해전에서 적선 133척을 격멸시킨 이순신 제독은 9월 17일부터 10월 28일까지 41일간에 걸쳐 서해 연안을 따라 이동하며 이러한 함대시위를 감행하며 적을 위협하는 고도의 계산된 심리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그곳까지 진출했던 왜군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압박감을 주어 결국 다시 경상도 방면으로 철수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2) 당시의 소금 제조법은 요즘같이 천일 염전식이 아니고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고 불을 때워 수분을 증발시키는 염자방식(鹽煮法)이어서 소금값이 매우 비쌌다. 그래서 소금을 소금(小金)이라도 하였다.

3) 사실 대륙국인 명나라의 해군력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이나 섬나라인 일본에 비하여 그 규모나 수준이 모두 뒤떨어졌었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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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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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라몽 211.117.162.214 2008-05-31

    또한 재정비의 이유에서도
    서해안으로 작전상 후퇴를 한 것죠.
    그 덕에 일본군 일부가 영산강 유역에서 진도를 넘어 서해안 일부까지 진격하여 주민들을 납치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의 유학자 강항도 왜놈들한테 잡혔죠.,

  • 도라몽 211.117.162.214 2008-05-31

    제가 알기로는 명량해전 이후에 서해안을 전전한 것은 일본군의 압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서 결전의 장소를 다시 찾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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