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5장 조선의 비극, 바보왕 이연(朝鮮의 悲劇 愚王 李淵)
조선의 비극 우왕(愚王) 이연 2

그러나 조선 통신사 일행을 전송한다고 따라온 가짜 중 겐소(玄蘇)와 대마도주의 아들 요시토모(義智)는 조선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에게 명년(1592년)에 왜는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귀띔하여 주었다.

오억령의 보고를 전해들은 왕 이연은 오히려 오억령을 국론을 어지럽힌 자라하여 파면하고 심희수(沈喜壽)를 후임으로 임명했는데, 그의 보고 역시 똑같았다. 이제는 유성룡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신들도 왜침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 옹고집 왕 이연이 전쟁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으므로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될 수 없었다. 왕이 스스로 적국이 쳐 들어오지 않는다고 국론으로 정하는 바보같은 일이 버젓이 행해진 것이다.

조정의 모든 중신들은 불과 수개월 전 1589년에 있었던 정여립의 참혹한 사건을 통하여 왕 이연의 뜻을 거스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왕권유지에 불안했던 이연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엄중하고 잔인하게 처리하였다.

정여립은 명종 22년에 진사가 되고 선조 2년에 식년 문과 을과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이듬해 이이의 천거로 수찬의 벼슬을 얻었다. 그는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사망하자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배반하고 서인의 영수인 박순, 성혼을 비판하였다.
이에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하여 정여립의 배신을 공격하고 이 상소에 의해 정여립은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왕 이연의 신임을 잃고 전주로 내려간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설파하였다.
이 말은 나라와 백성들의 안녕을 책임지는 일국의 군주라면, 왕의 혈통 중에서 뽑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를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과 수준 미달의 인물이 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왕권을 세습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행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정여립은 국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이이의 뜻에는 동감하여 대동계를 결성하고 열심히 무술을 연마하였다.

1587년 왜선 18척이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한 정해 왜변이 발발하였을 때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의해 대동계 무사들이 자원하여 이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나 오히려 정여립을 못마땅하게 여긴 서인들이 이 대동계가 모반 음모의 불측한 일을 위해 조직되었다는 악의적인 모략을 받게 된다.

이 당시 이연 왕은 동인이 장악한 조정에 의구심을 갖고 초조해하며 뭔가 정치적 돌파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1589년 이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해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을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의 연명으로 받게 된다.

왕 이연은 이 고변을 이유로 정여립을 잡아들이라고 명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여립은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정여립과 일면식도 없는 동인계 선비들을 무리하게 엮어 넣어 모조리 주살하고자 하였다.

정여립의 행위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이연은 정여립의 친족들과 친구들을 포함하여 그의 주위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로 역적으로 몰아 무려 1천여 명을 참살하였는데, 그 중에는 5살 어린 아이에서부터 82세 노파까지 섞여 있었다.
왕권을 지키려는 이연의 발악은 극에 달해 있었고, 그는 엽기적인 살인극을 연출한 악독한 살인마였다.

이때, 정여립 사건 처리를 총지휘한 사람은 그 유명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었는데 이 유명한 아첨꾼 정철도 큰 실수를 저질러 결국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실수라는 것이 왕에게 만약을 대비하여 왕세자를 책봉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영리했던 정철도 이 비겁한 왕의 심중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씨 조선왕조 존립기간 내내 전개되었던 그 지긋지긋한 당파 싸움은 이조 전랑(吏曹銓郞)의 인사 문제를 놓고 사림(士林)이 동인(東人•金孝元)과 서인(西人•沈義謙)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동인 중에는 이황,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은 이이, 성혼 등의 문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동인과 서인은 처음에는 학문과 철학의 차이에서 출발하여 경쟁적으로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듯이 보였고 적어도 서로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단결을 왕권에 대한 위협 요소로 파악한 이연은 교활하게도 이 순진한 선비들의 모임인 동인과 서인의 파당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확실히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씨왕가의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자는 그의 첫 번째 사명으로 이씨왕가의 왕권을 굳건히 지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성계에 의하여 여진 땅에서 내려와 한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을 선포한 이씨 왕족들은 처음부터 이 나라를 한국민의 나라로 보지 않고 그들 일족이 지배하는 이씨 왕가의 나라로 봄으로서, 나라의 안위나 백성들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들의 절대 왕권을 위협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잔인하게 제거함을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조실록에 기록된 역적 사건들의 거의 모두는 한민족에 대한 역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씨 왕가 일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비로소 이씨조선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된다.
우리는 평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듯 보이는 이연도 명색이 왕(王)이라서 조선을 다스리는 이씨왕가의 비방을 전수받고 이를 통치수단으로 절묘하게 이용하는 재주가 있었음을 깨닫고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보기로 하자.

당시의 정책은 신하들의 의견을 들은 뒤 왕이 재판관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식이었다.
이 때, 왕 이연은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신하들 중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오도록 유도한 후, 자신은 그저 신하들의 뜻을 존중하여 정책을 펴가는 듯이 처신하였다. 이렇게 결정된 정책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거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왕가의 존립에 반하는 결과에 이르면 곧 그 책임의 소재를 애초의 제안자나 그 파당에 물어 처벌하는 것으로 끝맺으면 그만이었다.

결국, 조선을 오욕(汚辱)의 역사로 점철시킨 파당 정책도 바로 왕 이연의, 신하들을 서로 이간시키고 싸움을 조장 분열시키는 교활하고 치사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583년 병조판서 이이(李珥)는 10년 이내에 전쟁에 필요한 군마와 10만 병력을 양성하여 도성방위에 2만 명, 8도에 각1만 명씩 배치하여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국란에 미리 대비하자는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왕 이연에게 바쳤는데 이때에도 왕 이연1)은 조정중신들의 갑론을박을 지켜본 후 최종적으로 이를 무산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 7년, 지금 다시 왜적의 침입을 운운하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왜적의 침입 가능성에 동의하여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산시킨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전쟁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국론을 정해 놓고 두 번 다시 재론하지 말라는 왕명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1) 이씨 조선왕가의 제14대(1567년~1608년) 왕이다. 이자는 조정의 국론을 고의로 분열시킨 장본인으로 이이의 10만 양병 제안을 물리치고 무방비 상태로 임진왜란을 불러들여 한국민을 재앙에 빠트린 원흉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댓글남기기
  • 김민수 211.216.77.33 2007-11-05

    참... 아쉽군요. 고려가 남아있었더라면...

  • 임명환 218.154.62.156 2007-08-18

    아무리 생각해도 이씨조선것들이란..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댓글 내용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