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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9장 조선해군 삼군 통제사 이순신 제독
조선해군 삼군 통제사(朝鮮海軍 三軍 統制使) 1

이순신 연합함대의 빛나는 승리는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수륙 연합작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4월 14일 새벽, 부산에 상륙 후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서울 함락 3일 전에 도망친 조선 왕을 쫓지 않고 무려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무르며 보급 선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일본군은 모든 지원을 육군에 집중시켰고, 서울을 점령할 때쯤이면 해군이 보급품을 싣고 서해 해상보급로를 이용하여 편안하게 한강나루에 도달할 것이므로 한강에서 재보급을 받고 평양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러한 작전에 따라 육군은 속전속결을 위해 가벼운 장비만으로 서울 점령에만 온 힘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니시군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급품이 바닥난 상태에 있었다.
한강에서 재보급을 받고 즉시 평양으로 진격하려 했던 고니시의 제1군은 해군 수송 선단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한강에 도착하기로 약속했던 일본의 보급 선단과 호위 함대는, 조선 해군의 최정예 함대로 예상한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스스로 무너지는 바람에 만나보지도 못하고 느긋하게 한려수도를 돌아 육군이 서울을 점령할 시간에 맞춰 항해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느닷없이 나타난 이순신 함대에게 일격을 당했으니, 5월 7일에 있었던 옥포해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해전을 통하여 일본군 4천 명과 2천 톤이 넘는 수송물자가 모두 물 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 놀라운 소식은 5월 15일에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도 전달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보급 선단의 괴멸로 더 이상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무작정 서울에만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부족한 보급품을 아껴 쓰면서 마지못해 서울을 출발하여, 도망간 조선왕을 쫓아 평양으로 진격해 갔다. 평양성을 깨뜨리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한 고니시는 그래도 얼마 후면, 초전의 실패를 극복하고 강력한 일본수군이 허약한 조선수군을 격멸하고 대동강에 보급선단을 도착시킬 수 있을 것을 믿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조선의 국왕이 미처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옮겨갔지만 이곳에서는 결사적인 반격이 있을 것이므로 부족한 총알과 탄약의 조달이 큰 걱정이었다.

왜장 고니시는 수송선단이 대동강에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평양성 공략에 임했는데 막상 평양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에서 결사전을 준비하고 기다렸어야 할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은 또다시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천만 뜻밖에도 고니시는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서울에 이어 평양성까지 무혈 입성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고니시의 행운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보 같은 조선군들이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무려 10만 석이 넘는 군량미를 고스란히 남겨 놓고 가버린 것이다.

조선군이 스스로 일본군을 궁지에서 구해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식량문제는 해결되었고, 조선 왕은 불과 3일 거리인 의주에 있다는 정보도 이미 입수하였다. 조선왕은 그가 갈 수 있는 조선의 영토 끝까지 도망쳐 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조선왕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탄약 부족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도 문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조선군이 고니시 제1군이 처한 탄약의 부족상황을 몰라서 미리 겁을 먹고 물러섰지만, 조선왕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의주(義州)에 배수(背水)의 진(陣)을 치고 죽을 각오로 격렬히 저항한다면, 이를 부족한 탄환으로 공격하다 오히려 큰 낭패를 자초할 것이라는 것이 고니시의 판단이었다.이리하여 고니시는 조선왕을 불과 3일간 거리에 두고도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평양성에 머물며 수로를 통한 보급선단이 대동강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72척의 일본 보급선단은 또다시 이순신 제독이 쳐놓은 봉쇄망에 걸려 남해안도 통과하지 못하고 당포 등지로 쫓겨 다니며 모조리 괴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루하루 불안하게 대동강만 쳐다보며 보급선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유키나가에게 더욱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서해안 보급 수송망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키 요시다카 총사령관을 비롯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총 합세하여 일본 최대의 함대를 편성하고, 일본 해군의 기함 니혼마루를 비롯하여 무려 6만 명의 정예 전투병력을 일시에 투입하여 조선의 해군 제독 이순신 함대 공략작전을 펼쳤는데, 이들이 모두 불과 이틀 만에 연이어 벌어진 한산도,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에게 참패하여 몰살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면 평양의 주둔군은 모두 어찌 되는가…. 이미 수많은 병사들은 빈총을 들고 경비를 서면서 조선군을 속이고 있는데 이 따위 잔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이며, 또 조선군이 남기고 간 군량미 10만석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이 시점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과는 달리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고니시의 제1군이,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함대에게 서해 해상 보급로를 철저히 봉쇄당하고 극심한 병참부족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반하여, 초전에 경상 좌, 우수군이 무너진 동해 쪽 해상 수송로는 규슈로부터 보내오는 보급품 수송에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단은 그들의 전진 속도에 맞추어 필요한 모든 장비와 식량을 원하는 지점까지 동해 해상수송로를 통해 보급 받을 수 있었으므로 애초에 계획했던 작전대로 순조롭게 진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해상수송이 아닌 육상으로만 병참수송을 감행할 경우 실로 적지 않은 장애물을 헤쳐가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의 지형이 대부분 산악지대의 연속으로 마차를 이용할 수 있는 큰길이 많이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도의 많은 길을 마치 보부상의 행렬처럼 등짐을 지고 험하고 좁은 산길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데 간신히 산길을 벗어나면 이번에는 넓은 강과 하천들이 수도 없이 많아 이 때마다 도강을 위한 선박 수배에 많은 시간을 지체해야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굶주린 도적떼나 날로 강력해지는 의병들이 도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왜군을 습격하고 수송품을 마구 탈취해 감으로써 부산에서 서울, 평양까지의 병참수송은 엄청난 난제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로서 해상 보급항로 확보여부가 사실상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였다.

보급 수로확보의 확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라는 것은 해상 보급에 어려움이 없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7월에 벌써 회령(會寧)까지 진격하여 그 곳에 도망쳐 와 있던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잡는 쾌거를 이루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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