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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4장 풍신수길(豊臣秀吉)
왜원장(矮猿將) 풍신수길(豊臣秀吉) 2

때마침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는 몰락한 다이묘, 일반 무사 등 불평분자의 처리 문제가 큰 현안으로 떠올라 있었다.
사실 히데요시가 당장에는 최강자의 신흥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전통을 자랑하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아직도 그들의 충성스런 가신(家臣) 조직과 막강한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어서 조금의 방심이나 빈틈만 보이면 상황이 일순간에 역전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땅으로 거국적인 출병을 도모하면 위로는 천황가의 소원도 풀어주게 되고, 그 공로로 자신의 지위를 다이묘들의 차원을 일거에 뛰어넘어 천황가의 귀족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더구나 아래로는 자신에 대한 잠재적 도전세력들의 전투력을 모조리 소진시켜 자신의 가문이 만세의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수확을 올릴 수 있다는 확실한 계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교활한 히데요시의 두뇌는 이처럼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벌써 조선을 거쳐 광활한 만주 대륙을 접수하고 명국(明國)마저 일거에 정복하여 천하의 주인으로 등극하는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선으로 가려면 대마도(對馬島)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그 대마도는 예로부터 조선으로부터 하사받는 세사미(歲賜米)로 겨우 살아가는 조선의 번국이었다.
히데요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마도주 요시노리를 불러 들였다. 대마도의 해적들은 왜인(倭人)들이 조선 상국과 달리 성질이 난폭하고 잔인함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스르면, 그것은 곧 대마도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늙은 요시노리는 즉각 달려가 히데요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때의 대마도는 큰 나라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국에 눈치를 보며 살아남기 위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주 요시노리는 일직이 아들 요시토모(義智)와 가신(家臣) 야나카와 곤노스케 노리노부(柳川權之助調信)를 구마모토(熊本)로 보내 도요토미가(豊臣家)의 가신이 되겠다며 항복의 서약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요시노리를 불러들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의 길잡이로 대마도주를 이용하기로 전략을 세우고, 먼저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제후(諸侯)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조선 정부에 일본의 뜻을 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의 히데요시는 수십년 이상 일본의 전 국토에서 진행되어온 골육상쟁의 오랜 전국시대를 마감시킨 최종 승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장 일본 천하에는 그의 명령에 도전할만한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 안하무인으로 처신하며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심으로 도취있었다.
그 교만함으로 그는 그가 한마디.호령하면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조선 왕이라 할지라도 당장에 달려와 항복할 것이라는 몽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니 일개의 해적두목인 요시노리에게 당장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 왕을 잘 달래서 이 히데요시에게 항복을 하도록 하라는 정신 빠진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은 떨어졌고, 이제 요시노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의 성패(成敗)를 떠나 주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히데요시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궁지에 빠진 대마도주 요시노리는 우선 그의 아들 요시토모(宗義智)와 가짜 중 겐소(玄蘇) 등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정부내의 분위기를 살펴보고 살길을 찾아보기로 한다.

아버지의 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파견된 요시토모는 우선 조선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동안 조선정부가 그에게 강력히 명령했던 정해 왜변(丁亥倭變)의 주동자였던 오도(五島)의 해적 두목 신삼보라(信三甫羅•信三郞), 망고시라(望古時羅•孫次郞), 긴시요라(緊時要羅•金十郞) 등을 붙잡아 조선으로 압송하였고. 이에 더하여 정해 왜변 때 잡혀간 조선 해군의 공태원(孔太元) 등 100여 명의 백성들을 구출하여 데려왔다.

뜻밖의 선심성 선물을 들고 나타난 대마도인 요시토모와 겐소를 접견한 조선정부는 한동안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여 당황하였다.

조선의 대신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요시토모(宗義智)와 겐소(玄蘇)는 공손히 꿇어앉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대감께서는 저희 대마도의 충성심을 조금도 의심치 마시옵소서. 저희 대마도주는 충실한 조선의 신하로서 성심을 다하고 있사온데 이번에 이웃나라인 일본 땅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7)라는 자가 일본을 통일하고 새로운 왕으로 올라섰으니, 이럴 때 상국 조선이 먼저 좋은 뜻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아랫것들의 경사를 축하해 주시면 작은 나라의 왕 히데요시가 더욱 감복하여 상국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고하며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 줄 것을 간절히 애걸하였다.

요시토모의 행동은 조선의 어리석은 왕 이연(선조,宣祖)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의 생각 있는 대신들은 요시토모가 애걸하며 조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저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전전긍긍 하였으나 사실 이웃 나라로서 일본의 신왕으로 올라선 히데요시를 그대로 승인해주고, 근래의 변화된 일본 사정도 알아볼 겸 한동안 단절되었던 양국의 국교를 다시 열어도 손해 볼 것은 없다는 계산하에 일단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꾸며진 통신사는 정사(正使)에 황윤길(黃允吉•西人) 부사(副使)에 김성일(金誠一•東人) 그리고 서장관(書狀官)에 허성(許筬)을 각각 임명하였다.

1590년 4월 29일, 조선 통신사(친선 사절단) 일행은 부산을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 때의 조선통신사 일행은 히데요시에게 조선의 궁중 예악(禮樂•雅樂)을 보여주기 위하여 궁중 악사들까지 동행하고 있었다.

200여 명이 넘는 조선의 친선 사절단 일행은 대마도에서 약 1개월 동안 체류한 뒤 현해탄(玄海灘)8)을 건넜다. 하카타(搏多), 나가토(長門), 세토나이 해(瀨戶內海)를 경유하여 사카이 항(堺港)에 상륙한 뒤, 육로를 통해 교토(京都)로 향하였다.

한편, 잔꾀 하나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 통신사의 행렬이 화려하고 장엄하다는 보고를 받고 이들 앞에 일본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하여 영접 장소인 큰성[巨城] 주라쿠다이(聚樂第)를 서둘러 완공시킨 후, 그 중 가장 큰 방에서 조선 사절단을 접견하였다. 회견은 11월 7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히데요시와 조선 통신사들의 첫 번째 회견에 대한 인상을,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히데요시의 용모는 작고 천하게 생겼으며, 얼굴이 검은 것이 다른 사람보다 두드러진 점이었다. 그러나 다만 눈빛만은 번쩍이는 것이 사람을 쏘는 듯하였다.”

단정하고 고결한 품격의 선비를 최고로 치는 조선 통신사들은, 원숭이를 닮은 이 작은 섬나라의 대추장 히데요시의 천박한 모습을 보고 그만 그를 멸시하는 선입견이 생겨 그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지 못하고 여러모로 잘못된 판단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어쨌든 히데요시의 이 날 회견은 과연 섬나라 추장답게 왕으로서의 체통은 전혀 없었고 궁중 예법에 어긋나는 무식한 작태를 계속 연출하여 조선 통신사들의 비웃음만 샀다고 기록하고 있다.

7)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히데요시의 벼슬은 간빠꾸(關白:平安시대 왕을 보좌하는 국무총리역)였다. 당시 일본에는 닌노우(人皇:神武천황 이후 역대천황) 107대 고요오제이(後陽成)천황이 있었으나 일본 천황가의 예산을 모두 쇼군(將軍) 측에서 부담하는 관계로 아무 권력도 없이 그저 상징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8) 현해탄(玄海灘)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현해탄(玄海灘)은 거친 물결로 유명하지만 가을부터 불어오는 북풍계열의 바람을 타면 쉽게 쓰시마와 일본열도에 닿을 수 있다. 그 반대로 봄철의 동남풍과 대한난류(쿠로시오)의 조류를 타면 쓰시마로부터 남해 동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
참고로 부산에서 쓰시마 까지는 53Km의 거리이고, 그곳에서 이끼섬까지 다시 53Km 그리고 규슈까지의 바닷길은 불과 20Km의 근거리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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