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3장 역성혁명(易姓革命)
역성혁명(易姓革命) 1

유사 이래로 만주대륙은 우리 한민족과 흥망성쇠를 함께 누려온 민족의 터전이요 선조들의 고향으로 절대적인 한민족의 성역이었다.
이곳은 수 만년의 세월동안 한토족의 자궁이었고 커밝한 한웅님의 배달한국[倍達桓國]을 거처 단군쥬신[檀君朝鮮] 그리고 해머슴[解慕漱]의 부여제국(夫餘諸國), 추무대왕의 고가우리[高句麗], 대조영의 밝해[渤海]와 경주김씨의 대김(大金)제국의 혼과 넋이 서린 민족의 성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몽골이 물러갔으니 그 연고권은 당연히 그 땅의 원주인과 같은 국명의 나라 가우리에 있는 것인데, 느닷없이 아무 상관도 없는 한족들이 이 땅을 무단 점령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왕씨 가우리는 어전회의를 거쳐 1388년(禑王,14년) 4월, 최영시중(崔塋侍中)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이성계를 우군(右軍)도통사로 하여 일선 사령관에 그리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佐軍)도통사로 각각 임명하고 관군 5만을 동원하여 요동 정벌(遼東征伐)에 나서게 하였다.

사실 가우리는 1370년에 선왕인 공민왕의 명령으로 두 차례나 요동을 공격하여 평정한 경험이 있으므로, 민족의 실지를 다물한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안고 출전시킨 이번 요동정벌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이 일이 가우리 왕실에 큰 재앙으로 되돌아 올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출정에 참여한 병사들의 사기는 처음부터 참담하기만 하였으니, 오랜 세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느라 모두가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부모와 처자식을 뒤에 남겨놓고 떠나는 병사들의 마음이 걱정으로 무겁기만 한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 수 없었다.

위의 지도는 압록강의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 위화도이다. 이성계는 요동정벌군의 선봉군을 이끌고 목표인 요동 만주벌판을 눈앞에 놓고 진격을 멈추었다.

물론 가우리 정부측에서도 병사들의 문제점들을 알고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신흥 명국군이 요동점령을 영구화할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한 요동의 선점 문제는 국가의 존위를 가름하는 중대사였던 것이다.

개경을 출발한 요동 정벌군은 병사들의 낮은 사기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압록강의 한복판에 있는 위화도에 진출하였다.

민족의 터전인 요동벌을 정벌하라는 국가와 민족의 절대명령에 따라 이제 강의 반쪽 폭만 건너면 선조들의 얼과 넋이 숨쉬던 민족의 고향땅이었다. 그런데 정벌군의 최선발 군단을 이끌던 이성계는 무슨 영문에서인지 돌연 도강작전을 중지하고 위화도에 진을 치고 머물러 섰다.

이때 이성계가 이끄는 우군의 병사들은 대부분 이성계를 개인숭배하며 따르는 그의 사병(私兵) 조직 가별초 출신들이었다.
뒤이어 위화도에 도착한 좌군(佐軍)도통사 조민수(曹敏修)가 이성계에게 진격을 멈춘 영문을 묻자, 이성계는 기상이 수상하고 압록강의 물이 불어 도강에 어려움이 있으며 병사들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어 있어서 무리한 진격은 오히려 해를 부를 수 있다고 설득하더니 아예 개경 정부에 요동 다물 작전을 철회하고 군의 철수를 허용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그러면 민족의 숙원인 쥬신[朝鮮]과 고가우리[高句麗]의 옛 영토를 다시 다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망설이고 있는 이성계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몽골이 한창 강성하여 유라시아를 거의 통일하고 가우리의 철령위(鐵嶺衛)에 쌍성총관부라는 대표부를 두어 통치할 때, 여진(女眞)인1) 출신의 이성계 선조들은 몽골에 충성을 맹세하고 점령군에 빌붙어 다루가치(達魯花赤)2)의 벼슬을 지내며 큰 세력을 떨쳤다.
그들은 한때 몽골점령군의 쌍성총관 집안과 정략적인 혼인 관계를 맺고 이를 배경으로 가세를 크게 키워 위세를 떨쳤던 일족으로 왕씨 가우리[高麗]의 반역 집단이었다.

사실 그 당시의 정치 풍토에서는 북녘 사람들이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을 한다는 것은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 하였다. 모든 벼슬은 왕실의 귀족들이나 권문세가(權門勢家)가 독점하고 있어서, 이성계 집안 같은 변방의 무사들은 전쟁에 뛰어들어 큰 공을 세워야 겨우 중앙의 눈에 띄는 정도였고 또 운 좋게 가우리의 벼슬을 얻는다 해도 이들에게 관군의 지휘를 맡길 리도 없었으므로, 이들은 자신의 사병 조직인 가별초를 거느리고 홍건적이나 왜구들을 토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성계의 선조들처럼 몽골 편에 붙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부류들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것이다.

몽골의 다루가치 집안에서 성장한 이성계는 무예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 정부로부터 소외된 많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언젠가는 이성계를 통하여 그 동안 정부로부터 소외받은 한을 풀어보려고 모인 집단이었다. 이리하여 이성계는 북변의 최대 군벌로 성장하였다.

때마침 고려 정부가 몽골이 설립한 쌍성총관부의 강제폐쇄를 명령하자 기회에 민감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재빨리 가우리 정부에 투항할 뜻을 표시하였고 이에 조정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지금까지 충성을 바쳐왔던 몽골측을 배반하고 병을 일으켜 몽골군을 축출하고 쌍성총관부를 폐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가우리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에 봉했고 이 벼슬은 나중에 이성계가 승계하게 된다.

이렇게 어렵사리 중앙의 눈도장 받기에 성공한 이성계는 그의 사병 조직인 가별초를 이끌고 1361년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진압하여 첫 번째 공을 세운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가우리의 도성 개경(開京)이 도적떼에게 함락되자 군벌 이성계는 즉각 그의 가별초 정예군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 일착으로 개경에 입성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곧 이어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한 몽골장수 나하추(納哈出)를 함흥평야에서 격파하며 기염을 토하자 가우리 정부는 그의 전공을 크게 인정하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의 벼슬을 내렸다.

1364년 몽골의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이성계는 최영(崔瑩)과 함께 출전하여 이들을 달천강(川江)에서 대파한 공으로 다시 승진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올랐다.
이후에도 이성계는 눈부신 승진을 거듭하였는데 1368년에는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1372년(공민왕 21년)에는 화령부윤(和寧府尹) 그리고 1377년(우왕 3년)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는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 자격으로 이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380년, 드디어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에 오른 이성계는 운봉(雲峰)에서 아지발도의 왜구를 소탕하는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큰 공(功)을 세우면서 거물급 군벌로서의 중앙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성계의 약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에 올랐고 다음해 1383년엔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면서 1384년에는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라 이제는 명실공히 가우리의 막강한 실력자로 그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로서 조정의 대신들은 더 이상 이성계를 야인 출신의 장군으로 폄하할 수가 없게 되었다.

1) 여진(女眞)인
여진인이란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간도지방 그리고 만주의 동부에 살던 우리민족을 가리킨다. 학자들은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여진인을 별족으로 구별하려 하지만, 정치사가 아닌 범 한민족(Pan Korean)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본서는 여진인을 한민족의 일족으로 보고 있다.

2). 다루가치(達魯花赤)
가우리 후기에 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民政) 관리인. 원래 몽골의 하급 관부와 지방의 노(路)·부(府)·주(州)·현(縣) 및 복속 국가에 대한 통치방식의 한 형태로 다루가치를 설치하였다.
1231년(고종 18) 가우리는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개경이 함락될 위험에 처하자 화친을 제의했는데, 이때 몽골군은 철군의 조건으로 서경을 비롯한 서북면 지역에 72명의 다루가치 설치에 합의하였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댓글남기기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댓글 내용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