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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2장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2

이순신의 대담한 도전에 진린은 당황했다. 지난 6월 25일, 진린은 그의 수군함대를 이끌고 한강의 동작나루에 도착 했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인 6월 26일 왕 이연은 진린을 환영하는 만찬연을 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소위 조선의 국왕이라는 자가 일개의 명국수군 장수에게 비굴하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에 우쭐한 진린이 조선왕은 안중에도 없는 듯 “배신(陪臣)들의 잘못은 모조리 군법(軍法)으로 다스릴 것”이라며 자신에게 조선의 대신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 하였었다.

이러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왕을 비롯한 그 신하들 중 누구 하나 일어나 항의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개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감히 천자의 장수에게 이처럼 대담한 도전장을 내밀다니 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진린은 이순신이 이미 잘못된 어명을 어기고 죽음의 문턱에서 갔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과연 이순신은 불의를 용납할 줄 모르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신념을 꺾을 줄 모르는 올곧은 인물이다.”라고 생각한 진린은 노여움에 앞서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자 진린은 갑자기 비굴한 웃음을 띠고 이순신에게 정중히 사과했으며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 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그러나 진린은 천성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은 자였다. 전쟁에서는 항상 뒤로 처져 자신의 안전을 지켰으며 전공을 논할 때는 남의 공을 가로채는데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인물이었다.

이 당시 이순신 제독은 불과 300리 거리에 강력한 왜적을 두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국왕의 뜻을 받들어 백해무익한 명국 장수 진린을 천장으로 받들어 모셔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순신은 함선을 계속 증선시키는 작업에 밤낮없이 매달렸다. 그 결과, 이순신 함대는 1598년 7월 중순에 85척의 전선을 보유한 당당한 함대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불과 사흘 뒤인 1598년 7월 18일에 녹도 만호 송여종은 왜선 100여 척이 녹도로 쳐들어 왔다고 보고 하였다. 이순신은 즉시 새롭게 증강된 함대를 이끌고 금당도(金堂島)로 출동한다. 그러자 명국수장 진린은 마지못해 이순신 함대의 후미를 따라왔다.

다음날 7월 19일 이른 새벽, 왜선의 동태를 감시하던 녹도만호 송여종은 왜적들 2만여 명이 100여 척의 전선에 분승하고 녹도를 출항하여 금당도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제독에게 보고하여 왔다.

이에 이순신은 먼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명국장수 진린을 섬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안전하게 조선함대가 해전을 하는 것을 구경만 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전 함대를 포진시켜 학익진(鶴翼陣)으로 기다렸다가, 어란진 형태로 밀집하여 들어오는 왜선들을 가운데로 몰아넣고 집중 포화를 퍼 부어 순식간에 왜선들을 격멸시켰다.

이 싸움의 결과 일본 해군함대 전선의 대부분이 이순신 함대의 함포작전에 걸려 참담한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 50여 척은 그 자리에서 완파내지 침몰 당하면서 왜병 16690명 정도가 함께 도살되었고, 나머지는 반파(半破) 이상의 피해를 안고 필사적으로 도망쳐 왜교로 들어가 버렸다.

이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산위에서 관전한 명나라의 해군제독 진린은 비로소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함대 운용술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한편 이순신 제독은 이 전투의 결과 원균 함대의 전멸로 일본에 빼앗겼던 남해도 이서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눈앞의 적을 공격함에 있어서 더 이상 배후로부터의 적 공격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진린을 육지로 올려 보내 막강 조선해군의 힘을 과시하여 그들의 높은 콧대를 꺾어놓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일로 인하여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이순신 함대의 막강한 파워를 진린이 목격하게 됨으로서, 이에 자신을 잃은 진린은 자신들과 비교될 수 있는 조선수군과의 연합작전을 극구 회피할 뿐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이순신의 단독 출동조차도 못하게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방해 공작을 펼쳤던 것이다.

그러던 중 10월 3일을 기하여 수륙 합동작전으로 왜교성의 고니시 군을 공격하자는 명국 육군 장군 유정의 밀서가 들어왔다.
이제는 제 아무리 겁쟁이 진린이라도 더 이상 출동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마지못해 조, 명 연합군의 왜교 탈환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수군도독 진린은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수군 제독으로서 생각할 수도 없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데, 그것은 제가 지휘해야 할 명국해군의 기함을 버리고 조선해군의 판옥선을 한 척 빌려 탄 후 비로서 출전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소위 대국이라고 큰소리치며 끌고 온 대명제국의 함선이 부실하다고 크고 튼튼한 조선의 전선을 타고 제나라의 함대를 지휘하는 우스운 꼴을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옛 기록들은 보통 한나라의 국방을 위하여 사용될 해군용 전선(戰船)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 나라가 보유한 최고의 기술들을 총동원하여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최고 성능의 제품을 만든다는 상식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보더라도, 당시 전선을 만드는 조선(朝鮮)의 조선술(造船術)이 명나라나 일본의 그것에 비하여 월등히 앞섰음을 증명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순신 함대 백전백승의 신화에는 조선 전선의 우수한 성능도 크게 한 몫을 기여했음을 알게 한다.

조선 전선의 우수성은 10월 3일 조, 명 연합함대가 처음으로 전개했던 본격적인 왜교 탈환작전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날 초저녁부터 시작된 작전에는, 조선을 구원해 주겠다고 갖은 생색을 다 내며 온갖 거만을 다 떨던 명국의 진린 함대가 처음으로 이순신 함대와 나란히 싸움에 참여하였다.

이 싸움은 밤 12시까지 약 6시간 진행되었는데 싸움이 끝나고 보니 이순신 함대의 손실은 단 한척도 없었는데 반하여, 명나라 함선은 무려 49척의 전선이 격침되었고, 이 전선에 승선했던 2500명의 군사들이 왜군들에게 포로가 되었거나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날 무사히 생환한 명국의 수군 군사는 불과 140명에 불과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 나라의 군함을 믿지 못하고 굳이 조선의 판옥선을 빌려타고 출전했던 진린제독은 이순신의 결사적인 구명 작전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돌아왔다.

그러나 조, 일 전쟁에 참전했던 명국 전선 총 77척 중 주력 전함인 사선 25척에서 19척을 단 한번의 해전으로 잃게 되었으므로 이후의 명국 해군은 실제로도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었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는 그래도 대명제국의 수군 도독이 자기 기함을 버리고 조선의 배를 빌려탄 채 전장에 나갔겠는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갚은 사실은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 자세히 나와 있고, 또 도체찰사의 자격으로 왜교 근처에 있었던 이덕형(李德馨)의 증언을 기록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선조 32년 2월의 대신회의 기록에도,
“...당선(唐船,明鞠戰船)이 선체가 왜소하여 부총병 등자룡(登子龍)4)과 수군 도독 진린(陳璘)5)이 우리 판옥선을 타고 전선으로 하였고....”라고 기록하여 위의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다.

1598년 11월 18일 밤10시경, 이순신 제독은 이날 저녁 6시경 노량에 무수한 일본 함대가 집결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제 조, 일 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이순신 제독은 마지막 출동에 앞서 이번 해전으로 조선침략의 최선봉에 섰던 고니시 군(軍)이 살아 돌아갈 수 없도록 응징하고, 두 번 다시 이 땅을 넘볼 수 없도록 철저한 징계를 왜적들에게 남겨야 할 것 이라고 역설한다.

그럼 이순신 제독은 무슨 이유에서 이것이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로부터 꼭 석 달 전인 8월 18일에 조선침략의 원흉이며 악귀의 화신인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이라고 하는 마지막 장벽을 넘지 못하고,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교토의 후시미죠(伏見城)에서 63세를 일기로 급사한 사실을 제독이 미리 알고 있었던데서 기인한다.

일본의 다섯 다이로들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조선에 주둔한 전 일본군의 본국 철수를 지시하였지만, 조선 주둔 왜장들은 이미 그들의 정보망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순천 지구의 고니시는 많이 늦은 11월 7일에야 이 소식을 들었는데, 더욱 고니시를 놀라게 한 사실은 처음부터 조선 침공군의 선봉을 경쟁했던 제2군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정식 철군 명령이 도달하기도 전에 벌써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아있던 왜장들은 모두 일본으로 떠난 배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했으며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11월 15일을 철수완료 시기로 잡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니시도 부하들을 모조리 왜성으로 모아 바다로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를 눈치 챈 이순신 제독이 탈출수로를 철저히 봉쇄하여 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던 고니시는 수군 도독 진린과 이순신 제독에게 엄청난 금은보화를 뇌물로 주며 탈출을 눈감아 주도록 애걸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개한 이순신이 “내가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조선에 들어온 너희들의 배는 단 한척도 돌려 보낼 수 없다(片帆不返 與賊同死).”라고 호통을 쳐 내쫓은 반면, 진린은 뇌물을 받아먹고 왜선의 탈출에 협력을 약속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순신 함대가 탈출로의 목을 쥐고 있고, 진린의 패잔함대는 그 후위에 있으므로 우선 이순신 함대의 봉쇄망을 뚫고 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고니시에게 남아있는 선택의 여지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순천에서 부산에 이르는 육로는 벌써 조, 명 연합군에 의하여 끊어져 있었고, 남아있는 마지막 선택은 바다로의 탈출뿐인데, 이를 위해서 필사적인 해전을 벌이면서 그 틈을 빠져 나가는 탈출 작전을 시도 해 보기로 하고 아직 남해에 남아있는 일본 함대를 모조리 노량 앞바다로 불러들였다.

이에 따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소오 요시또시(宗艤智),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의 일본 대장들이 이끄는 함대들이 노량 앞바다로 집결하였다.

이리하여 조, 일 7년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후의 해전에 참전할 당사자들이 모두 노량 앞바다에 진을 짜기 시작했다.

4) 제나라 배의 성능을 믿지 못하고 조선의 전선 함평(咸平) 소속선을 빌려 타고 출전한 부총병 등자룡은 배의 운용에 미숙함을 들어내며 왜선에 의하여 포위 격침당하면서 함께 죽었다.

5) 진린이 빌려간 배의 소속은 알 수 없으나 이순신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돌아왔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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