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2장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3

이 노량해전에 참전한 이순신 함대는 83척의 판옥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원래 이순신 함대소속의 함선은 총 85척이었으나 명국 수군의 도독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이 한 척씩 빌려 갔으므로 제독의 지휘를 받는 전선은 모두 83척의 군선에 약 17000명의 수병이었다. 이에 더하여 우군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명국수군이 있었으니, 도독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이 타고 있는 이순신의 판옥선 두 척을 포함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명국배 사선 6척과 호선 57척에 병력 2500명 정도가 일선에서 약 십리쯤 뒤떨어진 죽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일본측 함대는 바다에서는 최고의 맹장이라는 살마군(薩摩軍)의 시즈마 요시히로를 위시하여, 대마도 해적의 두목 고니시의 사위인 소오 요시또시 그리고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연합함대 약 300여 척에 60000명의 병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4시, 이순신 제독은 왜교 앞 바다를 지키던 함대를 이동시켜 각지에서 노량으로 들어와 결진하고 있던 적 함대를 급습하여 일대의 격전을 벌인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때의 해전을 노량해전이라고 부르며 그 전개 과정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이때의 싸움을 일본연합함대의 총사령관격인 살마군의 시즈마 요시히로의 종군기록인 인변진원(淵邊眞元)‘고려군각서(高麗軍覺書)’의 관련부분만 간추려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이른 새벽 바다에 짙은 안개가 끼어 사방 분별이 어려울 때 우리 함대는 가만히 고니시를 구하기 위하여 움직였다.”

“그런데 돌연 적선들이 나타나 공격을 가해왔다. 적들은 어립선(御立船,시즈마가 승선한 기함)을 집중 공격하며 마구 활과 대포를 쏘아 우리병사들을 죽였으며, 가까이 접근하여 불이 붙은 연초호(烟硝壺)를 발사하여 우리 배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많은 병사들이 불길을 피하여 물속으로 뛰어 들어 갔는데 적들은 이들을 긴 창과 장도로 쳐 죽였으며 거리가 멀면 활을 쏘아 죽였다.”

“어립선도 아주 위험에 빠졌는데 배의 방패는 모두 부서지고, 무수한 화살이 날아 들었는데 대장을 둘러싼 시자들이 목숨을 던지며 그를 보호하였으므로 유신공(시즈마 요시히로)은 겨우 사지를 벗어나 당도(唐島)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선묘중흥지’의 기록을 보자.
“이순신 함대의 기습공격에 왜선들이 크게 흩어졌는데 그 중 주력부대가 다급한 나머지 관음포 안으로 들어갔고, 이를 본 이순신 함대가 입구를 가로 막아섰다. 그러자 사방이 막혀 도망갈 길이 없음을 발견한 왜선들은 되돌아 나오며 발악하며 싸웠다.”

이순신 함대는 그들을 몰아놓고 집중 포화로 격멸시켜 갔는데 그들의 수효가 너무 많아서 그 자리에서 격침시킨 함선이 약 200척이고 반파(半破)되었으나 가라앉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 난 것이 약 100여 척 정도였지만, 상황이 급박하여 파손된 선박을 수리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온전히 살아 도망친 것이 약 50척도 못되었을 것이다.

새벽 4시경에 시작된 이 노량해전은 같은 날 아침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거의 끝났다. 약 4시간 정도의 격전이었다. 이미 관음포 안은 부서져 불타는 왜선들의 연기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이제 남은 일은 기동 불능의 적선을 하나하나 불태워 침몰시키는 소탕전뿐이었다.

바로 이때 기적적으로 만의 봉쇄망을 뚫고 탈출한 배들 중 한쪽이 이미 기울어진 상태로 뒤쳐져서 안간힘을 다하며 도망가던 왜선이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이순신 제독은 갑자기 북채를 빼앗아 손수 치면서 기함을 전속력을 기동하여 뒤처진 왜선을 추격하게 하였다.
일단 기함이 속도를 붙이며 반파된 왜선을 따라 잡자 왜선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제독의 뜻이 적선을 나포하는데 있다고 판단한 병사들은 왜선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긴 장병겸(長柄鎌)을 꺼내 들었는데, 돌연 이순신 제독이 뱃머리로 달려 나오며 뱃머리에 우뚝 서서 적선을 노려보았다.
이에 놀란 왜병들은 뱃바닥에 엎드리며 제독을 향해 조준하고 조총을 발사했다. 총알은 정확하게 제독의 가슴을 뚫고 관통하였다.

제독이 총탄에 쓰러지자 이에 놀란 측근들이 급히 달려들어 제독을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옮겼다.
그때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발설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곧 운명하였다. 제독의 나이 만 53세였다.

한편 왜교의 고니시는 자기를 구하러 온 일본의 연합함대가 이순신함대에 걸려 악전고투(惡戰苦鬪) 하며 죽어가는 사이, 그동안 비밀리에 준비했던 쾌속선을 타고 몰래 빠져나와 이미 매수해 놓은 명국의 진린 함대를 뚫고 멀리 파도가 거친 외항으로 돌아 부산포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저를 살리려 달려와 죽어가는 전우들은 아랑곳 않고, 혼자만 살려고 도망가는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과연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侍者)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 함대의 추격을 염려하여 부산포에 도착 하자마자 모든 잔존 선박들과 병졸들을 허겁지겁 모아 불과 나흘 만에 귀국을 서두르니 일본의 마지막 배가 부산포를 떠난 것은 노량해전으로부터 일주일도 못되는 1598년 11월 26일이었다.일본은 임진년(壬辰年)에 시작한 조, 일 전쟁 7년간에 걸쳐 무려 20만 명 이상의 원혼들을 한국에 남겨 놓고 떠나갔지만, 그동안에 귀중한 우리의 역사서들과 수많은 조선의 보물들을 훔쳐 갔고, 아울러 조선의 기술자들을 무차별로 납치하여 감으로써 일본을 일류 문화재 생산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이 이순신과 조선해군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조, 일 7년 전쟁 이후 1876년 구한말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근 300여 년 동안 그리도 극성맞던 왜구들조차 우리나라 해안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전쟁만 끝나면 이순신에게 무슨 죄든 뒤집어 씌워 죽이려고 작정했던 간악한 조선왕 이연은 이순신 제독이 전쟁 중에 스스로 전사해버림으로서 당황하게 되었다. 이미 죽어버린 이순신을 불러내어 트집을 걸기에는 구국의 영웅을 흠모하는 수많은 눈이 있었다. 마지못해 이순신에게 민심 수습차원의 벼슬을 내릴 수 밖에 없음을 깨달은 이 졸렬한 왕은 그를 조선해군을 한손으로 말아먹은 원균과 동격으로 대우하여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이라는 칭호를 주었다가 6년이 지나 그의 심기가 좀 가라앉자 의정부 좌의정(左議政)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을 추가로 봉하는 것으로 끝냈다.

필자에게는 이순신의 죽음이 명예스러운 전사(戰死)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위대한 제독의 업적을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면 할수록 이 고독한 영웅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는 왕 이연과 왕의 사돈인 행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등 간신배들의 교활한 획책에 분노하는 마음을 누를 수가 없게 된다. 뒤 늦게 생각하여 보니 만약 이순신 제독을 스스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왕 이연에 의하여 역적의 죄명을 쓰고 삼족을 멸하는 처벌에 이르렀을 것이 분명하였다.
왜냐하면 그자는 이미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왜병을 무찔렀던 의병대장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金德齡)을 잡아 고문하여 때려죽인 범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지원하던 유성룡이 영의정의 벼슬에 있을 때에도, 이미 한차례 자신을 죽이려고 비망기(備忘記)까지 내려가며 갖은 고문을 자행한 왕 이연의 암수를 영민한 이순신이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 죽음의 싸움이었던 노량해전이 있기 불과 40일 전에 그나마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던 유성룡이 결국 파당 싸움에 밀려 영의정직에서 파직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북인(北人)들과 서인(西人)들이 서로 결탁하여 왕을 등에 업고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유성룡이 더러운 당쟁에서 밀려나 벼슬까지 빼앗겼다면, 유성룡이 천거한 자신을 그냥 놓아둘 리 있겠는가?
이로서 이순신은 자신의 운명이 너무나 명확하게 정해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남은 전쟁은 자신이 이끄는 기동함대에 의하여 남해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할 것 이 분명하고, 이에 견딜 수 없게 된 일본군은 스스로 쫓겨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길어봐야 몇 개월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더 이상 장군의 쓸모가 필요없게 될 것이고, 적당한 때나 트집거리가 잡히면 왕의 칼끝이 반드시 자신의 목을 향 할 것 이 너무나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은 전쟁을 끝내는 마지막 싸움에서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고 더 이상 왜병들의 반격이 없을 것을 확신하는 마지막 순간에 최후의 적선에 다가서 스스로 적의 총을 맞고 전사함으로 그의 명예를 지켜 냈을 뿐만 아니라, 덕수 이씨(德水李氏) 집안을 멸문(滅門)의 위기로부터 구해냈던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민족 최고의 영웅을 잃었다.

※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충무공(忠武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것은 조선 16대왕 인조(仁祖)에 의해서였다.

다음은 군사 전문가이며 구국의 명장 이순신을 저술한 최석남(崔碩男)씨가 계산한 것으로 조-일 7년 전쟁 중 이순신 제독이 해전만으로 이룩한 불가사의한 전과 대비표이다.
일본 해군측 손실
격침, 나포한 일본 군선 : 총 935척
해전으로 희생당한 일본 병사 : 총 126,380명
이순신함대손실
해전으로 잃은 전선 : 총 1척
전사, 전상자 : 총 1,022명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댓글남기기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댓글 내용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