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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장 고려-몽골 연합대군 일본원정
고려-몽골 연합해군, 일본원정 2

서기 1231년 오고타이(窩活台)칸은 살리타이(撤禮塔)로 하여금 8개 군단을 이끌고 나아가 가우리의 관문인 흥화진(興化鎭•義州)을 공격하여 함락한 후 다시 8군을 남로군(南路軍)•북로군(北路軍)•본군(本軍)으로 나누어 개경을 향하여 맹렬한 전진을 감행하였다.

세계 최강 몽골 기병의 공격을 받은 가우리는 일단 몽골측과 강화를 맺은 뒤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1232년), 백성들도 산성이나 해도(海島)로 피난케 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몽골의 살리타이가 재차 한강을 넘어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處仁城•龍仁)에서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었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서기 1233년과 1234년, 오고타이의 몽골군은 가우리 공략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가우리의 동맹세력인 동진국과 강력한 대김제국(大金帝國)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이로서 몽골 제국과 맞서고 있는 나라는 남송(南宋)과 가우리[高麗] 단 두 나라만 남게 된 것이다.

서기 1235년, 몽골은 남로군과 북로군을 더욱 강력하게 편성한 후 땅꾸(唐古)를 원수(元帥)로 삼고 다시 가우리를 침략해 왔다.
이때 몽골군은 제1차 여•몽(麗•蒙) 전쟁의 실패를 거울삼아 공성전(攻城戰)은 피하고 기병 전술만 펴 가면서 가우리 깊숙이 침투하였다. 즉, 전 국토를 초토화시켜 가우리 정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우리군 최고 사령관인 최우(崔瑀) 장군은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해군을 총동원하여 수로(水路)를 철저히 봉쇄하였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눈앞에 두고서도 막강한 고려 해군의 방어망을 뚫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또한 고려는 5군(五軍 : 前•後•左•右•中軍)을 편성하여 강화도 연안을 방비하고 야별초군(夜別抄軍)으로 몽골의 병참 수송망을 끊어 그들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펴면서 대응하여 몽골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공격은 파상적으로 계속되어 1247년에 아무간(阿母侃)이 쳐들어 왔고, 1253년에는 원수 예꾸(也窟)와 아무간이, 1254년에는 정동원수(征東元帥) 차례타이(車羅大)와 예쑤타이 그리고 보포타이가 침입하는 등 전란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우리의 최우 군사정권이 최후까지 싸울 결의를 보이자 1258년 6월, 초조해진 몽골군의 정동원수 차례타이는 전 몽골병사들에게 고려 백성들을 상대로 어떠한 약탈•방화•살인 행위를 해도 좋다는 무자비한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몽골의 병사들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면서 강간•살인•약탈 행위를 자행하며 전국을 휩쓸고 다녀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 표는 당시 대몽전쟁을 주도했던 최우정권의 군 조직표이다.

우측의 조직표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국왕과 왕조군은 형식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고, 사실상 대몽 전쟁은 최우의 사병 조직인 도방과 서방을 중심으로 삼별초 및 민병들의 집단인 군현별초들의 결사전으로 진행되었다.

이때 몽골군은 강화도를 겹겹이 봉쇄하고 있었지만, 수전(水戰)에서만은 고려의 무적함대를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몽골의 고육책으로 실행된 차례타이의 가우리[高麗] 전 국토 초토화 작전이 매우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자 궁지에 빠진 가우리 정부는 모든 백성들을 인질로 삼고 흥정해 오는 차례타이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록 강력한 해군이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강화도의 황실과 정부만은 안전하였으나, 그렇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강화도에서는 권력을 빼앗긴 왕과 유경(柳璥) 등 문신들이 중심이 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등에 업고, 결사 투쟁을 주장하는 최씨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1258년).
최충헌 이후 4대 60여 년 간, 강력하게 가우리를 이끌며 세계 최강의 몽골과 맞서 싸워 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허약한 세습 황제의 친정 체제로 돌아가자, 글과 말만 앞세우는 유약한 문신들은 태자를 강화 사절로 몽골정부에 파견하는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入朝)하기 위하여 섬을 나오자, 삼별초(三別抄)의 배중손(裵仲孫), 노영희(盧永禧), 김통정(金痛精) 등은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여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반몽(反蒙)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기록을 보면, “1254년 이래 6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고려 백성 20만 6800여 명이 몽골로 강제 이주 당하였고, 그들과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 희생이 막심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의 태자가 몽골 땅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몽골 황제인 헌종(憲宗)이 남송을 정벌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태자의 입장에서는 이번 길에 몽골과의 강화를 성사시켜 30년간의 전쟁을 종식시켜야 했는데 그 협상 대상자가 없어져서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특한 태자는 정세를 정확히 파악한 후 헌종의 동생인 쿠빌라이1)를 지원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그를 찾아 나섰다.

마침 오고타이의 동생인 쿠빌라이(忽必烈)는, 강남 전쟁에 참가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려태자 일행을 맞는다. 오고타이의 왕자들이 서로 권력 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쿠빌라이는, 30년 전쟁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고려의 태자를 맞이하는 행운을 얻고 결국 고려로부터 대몽골의 대칸 계승권을 승인받게 된 것이다.

뜻밖의 고려 태자를 맞이하게 된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리(萬里) 밖에 있는 나라로서, 당 태종이 수십 번 친정하면서도 정복하지 못했는데, 오늘 고려 태자가 몸소 여기까지 찾아와 귀부(歸附)2)해 주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으로서 다음 대칸의 자리는 내가 차지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며 몹시 기뻐하였다. 곧이어 강화 회의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협정이 체결되었다.

1. 몽골은 고려 왕조를 인정한다.
2. 고려 서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과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소환한다.
3. 고려의 포로들을 모두 소환한다.
4. 몽골은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존중한다.
5. 서울을 다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기는 문제는 고려 조정에 맡긴다.

1260년, 몽골의 다루가치 속리대(束里大)의 호위를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태자는 그 해 4월에 왕씨 가우리[高麗]의 제24대 황위에 올랐다. 바로 원종(元宗)이다.

1) 쿠빌라이칸
몽골제국의 제2대 칸은 징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칸이다. 제 3대 칸은 오고타이칸의 아들인 구유키칸이고, 제4대는 몽케칸인데 몽케칸은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인 툴루이의 아들이다.
몽케와 쿠빌라이는 형제인데, 몽케가 죽자 쿠빌라이가 뒤를 이어 몽골제국의 대칸에 오르면서 몽골제국은 전세계 최강의 진정한 힘을 행사하게 된다.

2) 이 말은 ‘익제집’ 권9-상편의 ‘충헌 왕세가’ 원종 원년 3월조의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은 1260년에 쿠빌라이칸이 고려세자 왕전(王典)을 양양(襄陽-湖北省 소재)에서 접견했을 때 한말이다. 이 기록을 보면 쿠빌라이로 대표되는 몽골인들이 왕씨 가우리[高麗]를 당이 침략했던 고가우리[高句麗]의 맥을 이은 동족 왕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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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명환 218.154.62.156 2007-06-27

    죄송한데요. 오고타이의 동생 툴루이의 아들, 즉 조카가 쿠빌라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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