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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2장 최무선(崔茂宣)
자랑스런 한국인 최무선(崔茂宣) 2

느닷없는 가우리 해군의 출현에 놀란 왜구들은 한동안 당황한 듯 우왕좌왕 하였으나 곧 잔여 수비병 수천이 모두 군선에 올라 최무선 함대를 바라보고 달려들었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애착이 없어진 패잔병 집단인 이들은 가우리군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최무선이 바라고 있던 바였다. 드디어 최무선에게 꿈에 그리던 기회가 온 것이다. 최무선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그 동안 맹훈련을 거듭해 온 병사들은 능숙한 솜씨로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그 중 화포, 화통, 질려포가 엄청난 굉음을 내지르며 왜선에 명중하며 영문도 모르고 어리둥절하던 갑판위의 왜구들들 단방에 산화시켜 버렸다.

최무선은 이번 진포의 해전을 그동안 그가 연구하고 개발한 모든 병기들을 실전으로 실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신무기들 중 로켓식으로 발사되는 유화, 주화, 촉천화는 하늘을 가로질러 적선 깊숙이 파고들어 선체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사기가 오른 40척의 가우리 해군 전선들은 함재포를 일제히 작렬시켜, 항구 안에 집결해 있던 왜적선 500여 척을 단 한 척도 남김없이 모조리 파괴시켜 버렸다. 이로서 가우리 땅에 상륙한 왜구들은 되돌아갈 배를 모두 잃고 완전히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렸다. 최무선의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이로서 가우리 해군은 세계최초로 함재포를 장착한 함대를 보유한 전통을 세우게 된다.

진포해전으로 500여척의 배를 모두 잃은 왜구의 수괴 아지발도는 내륙의 각지로 흩어져 노략질에 열중이던 소두목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고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한다.

이때 배를 잃어 돌아갈 수단이 없으니 차라리 가우리에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자는 의견과 그동안 지은 죄가 용서의 한도를 크게 넘었으므로 참수형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어차피 죽을 바에 싸워보고 죽자는 의견이 맞섰다. 이에 아지발도는 왜구들의 힘을 다시 결집하여 관군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2만여 명의 도적들은 아지발도를 따라 정처없는 행로를 전전하게 되었다.

이때 아지발도와 왜구들은 옥천(沃川)•이천(利川)•영동(永同)•황간(黃澗)•중모(中牟)•화녕(化寧)•공성(功城)•청리(靑利)•상주(尙州) 등지를 통과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폐허를 만들었다.

기세가 오른 왜구(倭寇)들은 함양 동쪽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배극렴(裵克廉) 등 구원수(九元帥)와 싸워 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 등 두 원수(元帥)와 관군 5백여명을 죽이고, 함양을 분탕질 한 후 9월에는 운봉(雲峯) 인월역(引月驛)에 이르러 장차 광주에서 말을 먹이고 북으로 진격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이때의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 사진은 ‘황산대첩비지’인데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읍 화수리에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가우리 정부는 찬성사(贊成事) 이성계(李成桂)를 대원수로 하고, 도순찰사(都巡察使) 변안렬(邊安烈)과 왕복명(王福命)•우인렬(禹仁烈)•도길부(都吉敷)•박임종(朴林宗)•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이원계(李元桂)의 원수(元帥)들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케 했다.

이성계(李成桂), 변안렬(邊安烈) 등의 토벌군이 남원에 이르러 적이 인월역(引月驛)에 있다는 말을 듣고 운봉(雲峯)을 넘어 황산(荒山) 서북쪽 정산봉(鼎山峯)에 올라가 적을 포위하니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선봉에서 대항하여 왔다. 이성계(李成桂)와 이두란(李豆蘭)이 이를 쏘아 죽이니 마침내 적이 무너졌다.

최무선과 이성계에 의해 아지발도의 왜구들이 섬멸된지 3년 후인 1383년, 또 다른 왜구들이 대규모로 떼를 지어 120척의 배에 분승하여 침입해 왔다.

왜구의 출현소식을 접한 가우리 정부는 곧바로 정지(停止)를 원수로 삼고 대포를 탑재한 전선 47척을 파견하여 관음포에서 해적들을 포촉하고 최무선의 전법을 사용하여 왜선들을 단번에 격퇴시키니, 이것이 바로 박두양(朴頭洋) 해전이다.
더 이상 해적들을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가우리 조정은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다시 한번 토벌하기로 하고 2년 동안 새로운 군선들을 제작하는 등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1389년 2월, 가우리의 함대 사령관 박위는 전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 토벌 원정에 나서 악착같이 반항하는 왜선 300여 척을 격침시키고 대마도에 상륙하여 먼저 해안의 왜적 소굴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가우리의 해군은 섬의 곳곳을 철저히 수색하여 왜구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갈 뻔한 가우리의 백성 100여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왜선 1척을 온전하게 포획하여 적선의 장단점을 조사 연구할 목적으로 끌고 개선길에 올랐다.

이 작전은 가우리 해군이 치른 마지막 작전이었다. 가우리는 그로부터 3년 후에 여진의 용병장수 이성계의 반역적인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덧없이 망하고 말았다.

역성혁명(易姓革命)

그 동안 몽골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몸부림쳐 온 한족(漢族)들은 마침내 주원장(朱元璋)을 중심으로 명(明)나라를 건국하고, 몽골을 다시 북방 초원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몽골의 뒤를 쫓아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해 오던 명국은 몽골(원)의 쌍성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철령 이북지역을 명의 직속령으로 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해왔다.

이는 만주지방의 옛 고가우리[高句麗] 땅을 모두 다물하려는 왕씨가우리의 실지(失地) 회복 북진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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