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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1장 명량대첩
명량대첩(鳴梁大捷) 6 -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최후

불과 1시간여의 싸움으로 일본전함 20여 척이 깨졌으며 승선 인원 대부분이 몰살당하였다. 그러나 뒤로 물러설 줄 모르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본수병들은 아직도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기함의 함포를 피한 몇몇 돌격선들이 접근에 성공하여 배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이순신 제독은 울돌목의 정지된 물살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기를 기다리며 제2선 함대의 전투력을 비축(備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철쇠를 넘어 들어온 왜선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힘이 부치자, 그때서야 비로소 기함의 중군기(中軍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워 중군장(中軍將) 김응함(金應?)과 거제 현령 안위(安衛)에게 자신의 기함을 지원하도록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기함의 분전을 관망하며 대기하던 제2선의 12척 중 2척만 불러내어 기함을 돕도록 하고 나머지 10척의 전함들은 여전히 대기시키고 있었다.

전면에 나섰던 20여 척의 선봉 전함들이 모조리 격파되자 드디어 적의 대장선이 노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깃대 꼭대기에 새의 날개가 꽂혀 있었고 붉은 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누각 주위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적장은 다락방 위에서 선봉 돌격함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기함을 빠르게 몰아 접근한 후 집중 함포사격을 퍼부으니 일본의 대장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누각 위에 있던 적의 대장은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기함의 병사 김을손(金乙孫)이 물에 빠진 적장을 끌어올려 보니, 그는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 왜장은 반드시 이순신을 죽여, 당항포 해전에서 죽은 형님의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하며 스스로 선봉 돌격선단을 이끌고 악귀처럼 달려들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였다. 미치후사의 목은 즉각 기함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고, 멀리서 이를 본 일본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상대적으로 이순신 함대의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12시경에 시작된 해전은 어느새 3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북쪽으로 흐르던 물살도 서서히 바뀌어 남쪽으로 흐르더니 차츰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일본전함들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면서 노 젓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게 된 반면 조선 함대는 물길을 따라 흐르면서 마음껏 적선을 공략하는 데만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지금까지 기함의 공격 명령만 기다렸던 10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한 일본함대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단 한번 밖에 없는 기회를 포착해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申時)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이 극치를 발하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 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 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었으며,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왜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이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구한 명량대첩의 진상이었다4)

전투는 끝났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은 불과 13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

명량해협은 일본군의 패잔선과 시체들로 뒤덮였고, 이를 바라보는 제독의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로써 이순신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조국을 침략한 왜적들은 이제 곧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참의 지원 없는 북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명량대첩! 이것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첩중의 대첩이었다. 이 대첩을 통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고, 반면에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은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명량대첩의 불가사의는, 이처럼 한 나라의 군사력을 총동원한 세력과 패망의 기로에서 그 수 십분의 일의 병력만으로 결사적인 해전을 전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승리에 비해 피해가 너무나도 적었다는 것이다. 이순신 함대의 손실은 단 한 척도 없었고 인적 손실을 따져 보아도 일본측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데 비하여 우리측 희생자는 불과 34명에 불과하였다.

사실상, 명량해전은 조-일 7년 전쟁(朝, 日七年戰爭)중 전개되었던 마지막 승부처였다.

명량 해전의 패전으로 일본군의 수륙병진책은 전면적으로 무너졌고,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명량해전이 끝난 4~5일 후(1597년 9월 20일경), 서울에서 불과 200리 떨어진 직산(稷山)과 보은(報恩)지방에서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

물론 명량 대해전 이후에도 노량해전(露粱海戰) 등의 해전이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명량해전에서의 참패 쇼크로 인하여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왜군들이 다시 제 나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결국 독 안에 든 쥐를 잡으려는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비열한 왕 이연이 거지처럼 구걸하여 끌어들인 무능한 명군(明軍)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건방지게 종전협상을 한답시고 전쟁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그 모든 것도 명량해전 이후 잔명을 거두어 제 나라로 퇴각하려는 일본군의 탈출 기도와 단 한명의 왜적도 놓치지 않고 일망타진 하려는 이순신과의 힘겨루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 제독은 승리 확률 0%로 절대 불가능했던 싸움에서, 신기(神技)에 가까운 용병술과 절묘한 타이밍을 구사하며 단 한번의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적적인 승리로 이끌어 내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조국을 구해내는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전세계 해전사에 찬란히 빛나는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Oliver Edward Nelson)을 이순신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따위 망발은 진정 이순신 제독을 모욕하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제독도 스스로 배와 무기를 제조하고, 군병들을 모아 훈련시키며, 심지어는 전투중에 손수 농사를 지어 군량미까지 조달하면서, 한 나라의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대함대를 전멸시킨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4) 혹자들는 조-일 7년 전쟁의 3대 대첩으로 여러 전투를 꼽고 있지만, 그 어떤 대첩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명량대첩과는 비교될 수 없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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