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장 고려-몽골 연합대군 일본원정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제2차 일본원정(日本遠征) 1

사실 몽골측의 입장에선 일본정복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다만 몽골지배하의 신 세계질서에 일본을 편입시킨다는 정도의 정치적인 뜻이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몽골의 강요에 가우리가 마지못해 따른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세밀히 분석하여 보면 몽골측보다는 오히려 가우리측이 해적소탕을 위하여 몽골군을 지원병으로 이용하며 일본 원정에 더 적극적이었던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떨고 있던 일본의 막부(幕府)는 뜻밖에도 폭풍으로 피해를 입은 연합군이 원정작전을 거두고 현해탄을 건너 되돌아가자, 이 모든 것이 위대한 신의 가호라고 믿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비롯하여 16신사(新寺)에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또 새로운 신사를 도처에 건립하였고, 일본을 신국(神國)으로 자칭하며, 이 때의 바람을 가미카제(神風-신풍)이라고 이름 붙였다.사실 이 때의 태풍은 입춘 후 210일을 전후하여 일본 일대에 불어오는, 신풍도 아니고 신의 가호도 아닌 일종의 계절풍이었을 뿐이다.

한편, 예하 병사의 태반을 잃고 제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돌아간 홀돈은 쿠빌라이대칸 앞에 나아가 세밀한 전황보고를 하였다.

결국 가우리는 그들을 괴롭히던 해적들을 말끔히 소탕하여 이번 원정을 대성공리에 끝마친 반면, 몽골의 홀돈은 적의 서울에는 접근도 못해보고 병사들만 잃고 돌아와 너무나도 억울하였다.

이때, 쿠빌라이는 별 이용가치도 없는 섬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그 많은 군병을 다시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비록 이번 원정은 폭풍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왜인들이 이제는 몽골의 강력한 힘을 보았으므로, 일본왕이 스스로 항복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결론짓고, 입조(入朝)를 종용하는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사세충(社世忠)을 정사로 하는 쿠빌라이의 특사 일행이 가마쿠라 막부(괜倉幕府)로 파견되었다.
교토에 입성한 사세충은 기타조 도키무네(北條時宗) 장군을 만나, 항복하지 않으면 정벌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29세의 젊은 도키무네는 독실한 선종(禪宗) 신자였지만, 너무나 분한 나머지 몽골 특사들을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왜(倭•日本)에 보낸 특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몽골의 세조(쿠빌라이)는 대노하여 제2차 일본원정을 지시하였다. 이번에는 강남군 10만여 명에 군선도 3500척을 동원하도록 하였고, 홀돈의 동로군도 고려와 다시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번에는 반드시 왜왕의 목을 갖고 오라 명하였다.

한편, 가우리 조정은 몽골과는 또 다른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동안은 제1차 해적 소탕전으로 잠잠했던 해적들이 불과 7년의 짧은 세월 만에 또 다시 가우리 해안을 침범하기 시작하여 삼남의 해안가에 극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1차 원정 당시 성인 해적들만 토벌의 대상으로 삼고 노약자와 청소년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 화근을 불렀음이 분명하였다. 아무래도 한번 더 일본해적 토벌단을 파견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그 동안 제2차 원정을 나름대로 준비해 오고 있었는데 때마침 몽골의 쿠빌라이가 제2차 일본 정벌에 고려군도 합류할 것을 요청해 오자, 고려 정부는 곧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제1차 때에 비해 그 수를 증강하여 정벌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김방경은 제1차 원정 때의 경험을 거울삼아 이번에는 함선 건조4)에서부터 직접 감독하여 선체를 더욱 더 튼튼하게 개량하였다.
마침내 가우리와 몽골군의 제2차 연합군이 조직되었는데 이번에는 제1차 원정 때와는 달리 몽골측에서 강남군(江南軍)을 따로 대규모로 파견하여 교토까지 진격, 일본을 정복한다는 적극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여몽 연합군단의 제2차 일본 원정 도해 항로도

사실 제1차 토벌전 때에는 대마도의 남도 해적들을 주로 소탕하였으므로 아직도 대마 북도에는 수많은 해적들이 잔존해 있었다.
근래에 고려의 남해안을 침범한 해적들도 모두 이 곳을 소굴로 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그들의 근거지를 철저히 파괴하고 그 뿌리를 완전히 뽑으려는 것이었다.

제2차 원정군의 규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우리군 : 도 독 사 - 김방경
육군 - 10,000명
해군 - 17,000명
전선 - 900척
식량 - 12만 3560여 석
동로군 : 원 수 - 홀 돈 (몽골군 11,000명)
부 원 수 - 홍다구(가우리 군 4,000명)
강남군 : 사 령 관 - 범문호(타타르군-100,000명)
전 선 : 3,500척

1281년 5월 3일, 여•몽 연합군 중 가우리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은 모두 동로군으로 편성되어 가우리의 선박에 동승하고 합포(마산)를 출발하여 제2차 원정길에 올랐다.

원정군 도독사 김방경은 7년 전, 제1차 소탕전으로 말끔히 해결된 줄로만 알았던 해적들이 또다시 날뛰기 시작하여 가우리의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반드시 해적들의 씨를 말리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정하였다.

1281년 5월 21일, 김방경의 이끄는 가우리 군단은 대마북도에 상륙하여 즉각 해적 토벌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김방경의 해적 토벌전은 5월 21일부터 시작되어 5월 26일, 섬을 떠날 때까지 만 5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섬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반항하는 악질 무리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 결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나머지 무리들은 그들의 가족들을 이끌고 스스로 항복하며 목숨을 구걸하기에 이르렀다.

5월 26일 오후 4시경, 김방경의 해적소탕 군단은 일기도에 도착하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전통적으로 일기도의 해적들은 대마도 해적들보다 더 사납고 잔인하였다. 더구나 일본 본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제법 무사 흉내도 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단히 질이 나쁜 악질 해적들이었다.

지난번 제1차 정벌 때 일기도 해적들을 씨를 말리듯 사정없이 토벌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섬의 깊은 계곡과 동굴 속에 숨어 화를 면한 해적의 잔당들이 작당하여 맹렬히 저항하므로 가우리 군단의 제2차 해적 소탕전은 무려 10일간에 걸쳐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일기도를 철저하게 분쇄한 가우리군단은 몽골의 홀돈이 이끄는 동로군과 합류하여 일본 해적의 마지막 본거지인 하카타로 향하였다.

처음부터 해적 토벌이 목적이었던 고려 군단과는 달리 홀돈의 몽골군은 강남군을 무려 십만 명이나 투입하여 일본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때, 몽골군은 3개월분의 식량과 심지어는 농기구까지 준비하여 장기전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기어코 일본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야심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6월 6일, 여-몽 연합군은 시가노(志賀)섬에 상륙하여 일단 일본 정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바로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왜적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왜장 가오노 로쿠로미치아리(河野六郞通有)가 하카다 일대를 소굴로 삼고 있던 해적 두목들을 총 소집하여 선단을 조직하고 이들을 독려하여 용감하게 연합군의 군단에 도전해 온 것이다.

이것이 일본과 가우리간에 벌어진 최초의 공식 해전이었다. 그 동안 김방경은 1차전 때의 경험을 살려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군선을 제조해 왔고, 또 몽골군 총포의 위력을 보고 벤치마킹하여, 육군의 공성용(攻城用) 투석기를 함재 화공용으로 개량하여 몽골군의 총포대신 전선에 장착하고 있었다.

드디어 가우리 해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은 것이다. 황해와 남해를 내해(內海)로 삼아 제해권을 행사해온 전통의 고려 해군들은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4) 1592년, 임진왜란중 남해의 해전에서 기적같은 맹활약을 펼치며 조선을 위기에서 구출한 조선해군의 해군 주력선인 ‘판옥선’ 전함의 원형은 이때 만들어 졌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댓글남기기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댓글 내용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