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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8장 이순신함대
이순신 연합함대(聯合艦隊) 제2차 출전 전과 2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병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왜군의 전략을 정확히 궤뚫어 보고 엄청난 병력의 열세를 보급로의 차단으로 극복하려 한 이순신 제독의 판단은 그가 이미 전쟁 발발 전부터 적의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적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파악하여 전략을 세우고 각각의 전투 상황을 주도해나가는 전술을 채택하여,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장에서 적을 맞아 싸우며, 절묘한 함대의 운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능력을 한치의 오차도 실수도 없이 보여준 만점짜리 시험답안과 같은 전쟁이 바로 이순신에 의해 치러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이제야 위기를 실감한 원수(元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조선 원정군 대장들에게 비상대책회의에 참가하도록 통보하였다. 그런데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기는 이시다 미쓰나리나 요시카와 히로이에를 비롯한 모든 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승패는 병사들이 전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분한 화약과 총알 등의 전투용 무기와 군량미의 보급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지금같은 상황에서 이를 방치했다가는 결국 자멸에 빠질 것이 명확했으므로 무슨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안전한 해상 보급망의 확보해야 한다는데 모든 장수들의 의견이 일치하게 된다.

이날의 작전 회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1. 새로운 해군 지휘부를 웅포(熊浦, 熊川)에 두고, 전일본 연합함대를 새로 편성한다.
  • 2. 연합 함대는 3군으로 나눈다. 제1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10)가 맡고, 전함 70척을 배정한다.
  • 3. 연합 함대 총사령관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맡는다. 구키 사령관은 제2군을 이끈다. 일본 최대의 전함인 니혼마루(日本丸)를 기함으로 하고, 오타루, 나미키리, 야마시라즈 등의 전선을 지휘한다.
  • 4. 제3군 대장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맡는다.

이로서 일본의 연합 함대는 전함 115척의 거대 진용(陣容)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이순신을 의식한 남해 돌파 작전에 임하는 일본의 결의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케 한다.

7월 7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은 그들의 육전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계획대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6월 14일 부산에 도착하여 해전용 전함 115척으로 연합 함대를 편성하고, 부산 서쪽 30km지점에 있는 웅포를 해군 본영으로 삼아 남해안 돌파전 준비를 마쳤다.

제2군의 구키 요시타카는 일본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장 70m의 거함 니혼마루(日本丸)를 기함으로 하여 가토 요시아키의 제3군과 함께 총 42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웅포에 머물렀다. 제1군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는 초대형 층루선 7척을 포함하여 70여 척을 주어 선봉에 서게 하였다.

서울의 우키다 히데이에 원수는 일본해군의 작전 개시와 동시에 60세의 노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군단 3만을 주어 전주성을 격파하고 전라도 수군 본영을 공격하여 이순신의 근거지를 없애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일본 육군이 돌연 전라도 진공작전을 개시하고 또 웅포에 대선단이 집결하자, 이들의 작전을 미리 간파한 이순신 제독은 곧 이억기 수사에게 통보하여 좌수영으로 불러들인 후 제3차 연합 함대의 출동을 계획하였다.
6월 23일, 일본 해군의 제1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함대 70여 척은 웅포를 발진하여 견내량(見乃粱)을 통과하였다.

7월 4일, 전라우수군 이억기 함대 25척이 여수에 도착하였고, 7월 6일에는 제3차 이순신 연합함대가 전라좌수영을 발진하였다.
이때의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도중에 원균 함대 7척을 합류시켜, 새로 건조한 거북선 1척을 포함하여 총 56척(거북선 2척)의 전단으로 구성되었으니 조-일 전쟁이 발발한 후 최대규모로 가히 천하 무적함대라 할만 하였다.

7월 7일, 이순신 제독은 마침내 적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에 따라 세밀한 작전을 각 함장들에게 지시한 후 7월 8일 새벽, 6척의 특공 선단을 견내량에 투입하였다.

이 때, 특공 선단은 일본측의 정탐선 2척을 발견하고 맹렬히 추격하였다. 특공 선단의 추격에 적선은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본진이 있는 두호리 포구로 달아났다.

한편, 두호리 포구 안에서 대기 중이던 야스하루는 드디어 기다리던 이순신 함대가 출현했음을 발견하고 즉각 요격 함대를 출동시켰다. 견내량은 통영 반도와 거제도 사이에 있는, 남북 길이 약 3km, 너비 약 500m의 좁은 수로이다. 특공 임무를 띤 특공 선단 6척이 적의 정탐선을 쫓아 야스하루 함대가 집결해 있는 두호리를 급습하자, 대기하고 있던 적의 요격 함대가 맹렬한 속도로 따라 나왔다.

곧이어 야스하루의 기함이 기동하기 시작했고, 이에 겁을 먹은 듯 이순신의 특공선단은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사기가 오른 왜 선단은 성급한 추격을 시작하였고, 특공 선단은 이들을 유인하며 견내량의 좁은 수로를 통과하여 한산도 북쪽의 넓은 바다로 빠져 나왔다. 70여 척의 야스하루 함대가 6척의 특공 선단을 잡기 위해 맹렬히 뒤를 쫓으니, 마치 거대한 호랑이가 토끼를 잡으려는 모습과 흡사하였다.

드디어 견내량을 빠져나온 이 미련한 호랑이 함대는 이순신이라는 명포수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보잘것없는 토끼를 쫓으며 의기양양하던 호랑이는 어느 틈에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덫, 이순신 함대를 발견하고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 유명한 이순신의 학익진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책략에 빠져든 것을 안 야스하루는 곧 배를 돌리려 하였으나, 밀려드는 그의 후속 함대 때문에 좁은 견내량을 다시 통과해 후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일단 결전을 결심한 야스하루는 총공격을 명하였다. 소의 어란진이라는 일본군 특유의 돌격작전이었다. 그러자 조선의 전함(판옥선)들은 슬그머니 측면으로 돌아 왜선을 가로막고는 일제히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10)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左兵衛,1554~1626)
일본 오미 지방의 아사이군 태생으로 야쓰히데의 장남. 원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휘하였으나, 히데요시 밑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아사이 나가미사의 오미 코타니 성을 공격하며, 다른 장소인 하리마 미키 성의 공략에 참전했고, 시즈카타케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장수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음.
히데요시와 스모토성 함락, 큐슈 평정의 선봉으로 사가미 오다와라성 정벌 등 화려한 전력을 지녔으며 특히 총을 잘 다루고 전투에는 최고의 용맹을 발휘하는 장수였다.
▶ 39세의 야스하루는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날린 인물이기도 하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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