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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9장 조선해군 삼군 통제사 이순신 제독
조선해군 삼군 통제사(朝鮮海軍 三軍 統制使) 2

한반도를 전쟁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임진년도 흘러가고, 어느덧 1593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일본의 평양 방면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심정은 실로 참담하기만 하였다.
그 동안 조선군이 남기고 간 군량미로 그의 군대가 겨우 연명은 해 왔으나 이제는 그나마도 바닥이 나 버렸고, 총탄과 화약도 겨우 비상용만 남아 있었다.

이제 고니시는 자신이 평양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양성이라는 거대한 쥐덫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쥐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는 자괴감(自愧感)에 빠져 들고 있었다.
이런 때 만약 조선의 관군들이 싸움이라도 걸어오게 되면 그들의 속사정이 금방 들통 나 버리고 말 것이다. 더구나 압록강 건너에 명국군(明軍)이 집결하고 있어 머지않아 전쟁에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어서 하루하루가 마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만주벌판으로부터 불어오는 매섭고 추운 눈보라가 잔인하게 평양성을 엄습해 왔다.
따뜻한 날씨에만 익숙해 있던 일본 병사들은 다 헤어진 여름용 군복만 걸친 채 평양의 매서운 추위에 얼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일본의 보급선단이 대동강에 나타나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병사는 한명도 없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의 해군제독 이순신이 남해해로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는 한 더 이상의 먹을 식량도, 싸울 총탄도 그리고 추위를 막아줄 방한복의 보급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국의 히데요시는 평양성을 버리고 철군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사(餓死) 직전의 부하들을 어찌 해야 좋은가...

때마침 병사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동강으로 들어와야 할 보급 선단이 부산진 깊숙이 숨어 있다가 이순신이라는 괴물 함대에 의해 쑥밭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출항 기지인 부산진이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그 지경으로 초토화되었다면, 이젠 일본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 땅의 귀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병사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동안 부상자들은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아 상처는 곪아 터졌고, 동계 장비가 없어 여름 복장을 한 채 추위에 떨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귀국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상실당한 고니시의 제1군은 땅에 떨어진 사기를 다시 추스르기도 벅찬 지경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성의 사령부도 속수무책으로 대부분의 작전을 현지 사령관의 재량에 맡긴 상태였다.
따라서 떼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이라도 한성으로 후퇴하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그러나 한성 사령부는 후퇴만은 결코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철군의 명분을 찾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의 잔병 수를 점검해 보니, 그 동안의 엄청난 희생으로 겨우 8천여명 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이들의 목숨만이라도 건지려면 후일에 모든 책임을 홀로 뒤집어 쓸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퇴각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 때, 조선의 장수 김명원(金命元), 이일(李溢), 이원익(李元翼) 등은 정규군 8천 명과 의병 3천 명 등 총 11000명으로 평양성 탈환 작전을 개시하였는데, 마침 명국군(明軍)의 대장 이여송(李如松)1)이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방위를 위하여 4만 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조선군의 평양 탈환작전에 참여하였다.

1월 7일, 조, 명(朝, 明) 연합군은 평양성의 칠성문(七星門), 보통문(普通門), 함구문(含毬門) 등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2).

이미 이순신의 남해안 봉쇄로 인하여 총탄이 바닥난 왜병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방어에만 급급하며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철군의 명분을 찾고 있던 유키나가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불을 뿜어 대던 조, 명 연합군의 포격이 멈추고 다음날 평양 입성 돌격전을 위해 일찍 휴식에 들어간 그날 밤, 유키나가는 은밀히 포위되지 않은 대동문을 통하여 평양성 철수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부상자와 병자는 그냥 내버려 두고 힘이 남아 있는 자들만 대동문을 통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날이 새기 전에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 조선군의 추격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령은 비참했다.

전투에서 후퇴작전은 공격작전보다 훨씬 더 힘들게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 그 이유는 쫓기는 병사들의 불안심리가 대오를 이탈하며 무질서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직 건강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그 자신이 직접 지휘하며 제일 후발대를 맡아 앞선 부하병사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 것은 그가 장수로서 그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것이며, 반드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군의 추격으로부터 부하들을 엄호하겠다는 배려였다.

진격해 올 때의 그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은 쫄쫄 굶은 거지 군대가 되어 처참한 몰골로 도망가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유키나가는 울면서 따라갔다.
이 당시 평양 작전에 참전했던 왜병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五衛門)은 후에 그의 일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날 밤은 북풍이 몹시 불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 하였고,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 하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지팡이 대신 활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고, 막대기가 다 된 다리를 그저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라는 죽음만이 길가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21일, 패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신히 한성에 도착하였다. 철군 도중 1400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는 6600명에 불과하였다.
고니시는 차마 한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의 용산(龍山)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유키나가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성까지만 오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정은 한성 사령부도 마찬가지여서 성내의 쥐를 잡아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해상 봉쇄는 이렇게까지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제 이미 북상해 있던 왜군들은 모두 서울로 집결해야만 하였다. 물론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도 이미 서울에 집결해 있었다.
이리하여 서울에만 무려 10만이 넘는 왜병들이 들끓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난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할 수 없이 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와 17명의 왜장들은 연서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그들의 극심한 식량난을 알리고 더 이상 전투 행위가 불가능하니 최소한 부산까지 만이라도 철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조선에 출병한 모든 장수들이 합심하여 철병을 요구하는 청원에 별다른 묘책이 없던 히데요시도 결국 철병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4월 18일, 서울을 점령했던 왜병들은 더 이상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서울을 떠나 처량한 후퇴 행진을 개시하였다. 이미 기진맥진한 왜병들은 부산까지의 행군 도중 그들을 사냥하려는 조선 의병들의 습격을 염려하여 조선과 동맹 관계에 있는 명군에게 매달려 회군시 그들의 안전을 미리 보장받고 있었다.

남해안 봉쇄를 통해 일본 상륙군들을 굶주림 속에 몰아넣고, 서울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고 떠나게 만든 이순신의 활약은 실로 영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쳐 버린 비겁한 왕 이연의 눈에도 이순신은 확실히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제 이순신을 빼놓고는 조선 수군을 생각할 수 없었다.

1) 이여송(李如松, ?~1598년)
그의 5대조는 원래 성주(星州) 이씨(李氏)의 조선인으로 명국(明國)에 귀화한 조선인의 후예로서 요동(遼東)의 철령위(鐵嶺衛)에서 출생했다. 1593년에 원군 4만을 이끌고 평양 탈환 전투에 참전하여 조선군을 도왔다. 그러나 벽제관에서 일본군 고바야카와 다까카게(少早川陵景)의 기습을 받고 크게 패한 후 그해 말에 철병하고 만다.

2) 명군의 참전으로 왜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엄청난 과장이다. 당시의 명군은 거지 군대로서 자신들의 식량마저 조선군에게 얻어먹으며 전투를 했으니 이게 어디 동맹국을 지원하러 온 군대인가!
또 그들의 전투력이라는 것도 도망가던 왜군이 벽제에 이르러 반격해 오자 그만 혼비백산하여 개성까지 도망쳐 버린 오합지졸들이었다. 그 동안 군 작전에 무지하고 사대사상에 젖어 있던 학자들이 명국의 공을 과대평가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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